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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필립 제이슨 - 서재필
내 이름은 필립 제이슨 - 서재필
  • 의사신문
  • 승인 2012.05.2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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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국민 깨우치는 게 더 중요”

의사를 하기 어려웠던 우리나라 첫 현대의학 의사 - 서재필

오늘 밥상엔 나물이 많네? 콩나물, 시금치, 취나물에다 우와! 호박나물까지??. 윤아, 얼른 고추장 가져와야겠다. 아빠는 비벼먹어야겠어. 달걀 하나 부치고, 참기름에다가??. 꿀꺽∼.

“엄마, 아빠가 비빔밥이 생각나는가 봐요.”

그래, 벌써 군침이 도네. 오늘은 비빔밥을 먹으면서 누구 이야기를 할까? 오랜만에 한국음식이니까, 우리나라에서 처음 현대의학 의사가 된 서재필 이야기를 해줄게.

때는 19세기 말, 그러니까 1894년 정도일거야. 미국의 워싱턴에 있는 조선 공사관의 다락방에서 비쩍 마른 남자가 구겨진 양복을 걸치고 나왔어. 그 사람을 뒤따라 나온 여인이 손을 흔들며 비씩 웃었어.

“오늘은 몇 사람이나 병원에 올까?”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잡았다가 꺼내 보더니 다시 집어넣었어. 동전 너덧이 부딪히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어.

남자는 미국에서 막일을 하면서 어렵게 의사가 되었지만 먹고 살기가 정말 어려웠어. 그가 내뿜는 날숨은 워싱턴의 차가운 바람에 하얗게 드러났어.

이 사람이 누구냐. 필립 제이슨(Phillip Jaisohn)으로 조선에서 미국으로 도망간 바로 서재필이었어.

서재필은 열여덟 살이란 어린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여 동네에서는 큰 잔치를 열고 난리가 났어. 자신도 새로운 앞날이 환하게 열리는 듯해 기분이 좋았다고 해. 그러나 15살이 많은 김옥균이라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고 나선 운명이 완전히 뒤바뀌게 돼.

김옥균은 서재필에게 이렇게 말했대.

“우리가 힘을 길러야 해. 힘이 있어야 나라를 지킬 수 있어.”

그래서 그는 얼떨결에 일본으로 건너가 육군학교에서 공부하게 돼. 그런데 조선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큰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이를 갑신정변이라고 불러.

그러나 단 사흘 만에 실패하고, 주동자들은 죽거나 다른 나라로 몸을 피하게 돼. 몇 개월, 몇 년이 지나 서재필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거의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게 돼. 그러나 서재필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철도 공사장에서 일하면서 밤에 촛불을 켜고 공부하여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현대의학 의사가 되었어.

“아빠, 왜 서재필은 미국으로 갔어요?”

다른 나라에 몸을 피하는 것을 망명이라고 불러. 일본으로 왔지만 다들 양반집 자식이라 몸을 쓰는 막일을 전혀 하지 못했어. 일본에서도 아랫사람을 부리려고 하니 도대체 되는 일이 없었지. 조선에서 가져간 돈이 떨어질 무렵에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다시 돌아갈 궁리뿐이었어. 그러나 유일하게 서재필만이 일본에서부터 스스로 막일을 하는 노동자 생활을 시작해 미국에서도 길가에 자란 들풀처럼 힘겹게 살아가게 돼.

서재필은 미국에서 의사가 되면 잘 살게 될 줄 알았나 봐. 뭐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러나 동양인으로는 의사가 되어도 집을 마련하기 쉽지 않았고, 먹는 것조차 어려워지자 할 수 없이 조선 공사관에 구걸하듯이 부탁해 겨우 잠자리를 마련했던 것이야.

그러나 엄청난 바람은 다시 한 번 휘몰아치지.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이라고 하여 다시 서재필이 지지하던 세력이 득세하게 돼. 그래서 서재필은 중추원 고문이 되어 의사가 아닌 언론인으로 1896년 열한 해 만에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네. 조선으로 돌아올 때도 서재필은 뱃삯이 없어 공사관에서 겨우 빌려 왔다더구나.

“우리나라서는 왜 의사를 하지 않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서재필이 우리나라에서는 의사를 하지 않았는지 궁금해 하지. 아빠는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면서 너무 고생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갑신정변 실패 후 도미, 주경야독으로 한국 첫 현대의학 의사돼
독립신문 창간·만민공동회 등 통해 독립운동·근대화 큰 기여


서재필이 한글만으로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띄어쓰기를 하게 만들어. 그래서 서재필이 영어를 섞어 말하면서도 한문을 쓰지 못하게 하고, 한문과 달리 영어식으로 띄어쓰기를 한 것을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상황을 알면 서재필이 왜 그렇게 한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어.

우리나라 주변의 여러 나라 중에서 중국이 조선을 워낙 강하게 옥죄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 빨리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우리나라가 살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물론 지금 생각하면, 중국을 견제하고, 일본을 너무 조심하지 않아 결국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말이야.

서재필이 우리나라에서 의사를 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의사로서 사람 몇 명을 살리는 것보다 국민을 깨우치고, 사회를 바꾸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서재필은 신문을 이용하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이 마음에 담고 있던 생각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독립신문을 통해 서재필은 잘 사는 나라의 의료제도를 소개하고, 우리나라도 새로운 병원을 만들고 의과대학을 세워야한다고 주장하였어. 또한 황열병 의학연구소에서 세균학을 연구했던 경험으로 조선에 들끓던 콜레라의 원인에 대해서 이야기했어.

“아빠, 황열병은 노구치가 걸린 병인데??.”

그렇지. 우리 윤이 똑 소리 나네.

서재필이 조선에 돌아왔던 그해 콜레라라는 전염병이 유행하였어. 평안북도에서만도 육만 명이 넘게 죽었고, 전국에서는 몇 십만 명이 죽었다더구나.

당시 사람들은 병은 귀신이 일으킨다고 생각했어. 콜레라가 유행하자 귀신이 들어오지 못하게 마을 어귀에 장승을 세우고 집집마다 금줄을 두르거나 부적을 붙였어. 서재필은 이런 전염병의 원인이 귀신이 아닌 세균이라는 사실을 신문을 통해 널리 사람들에게 알렸어.

그런데 조선에서는 또다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지. 왕비인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들에게 궁궐 안에서 암살당하는 비참한 사건이 발생했어. 이로 인해 개혁에 앞장섰던 총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참형을 당하거나 유배를 떠나고, 고종이 궁궐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는 사건이 벌어졌어.

이를 기회로 러시아는 우리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어.

서재필은 이러다간 우리나라가 러시아에게 잡혀먹을지 모를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어. 서재필은 신문에다가 우리나라에 대한 러시아의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쓰고, 만민공동회를 열어 러시아 고문단이 물러날 것을 요구했어. 결국 서재필은 러시아의 강한 반발로 중추원 고문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어. 결국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돼.

“그래도 서재필은 다치지 않고, 괜찮았네요?”

어, 당신도 질문을 해요? 서재필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거든??. 러시아에서도 서재필을 해치고 싶었으나 미국 국적이라 어쩔 수 없었지.

간혹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갈 때 당시로서는 큰돈인 7년치 월급을 받아간 것을 두고 가난한 나라에 너무나 무리한 요구를 했다고 욕하는 사람이 있어. 그러나 미국에 가서도 살길이 막연하였던 서재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결국 서재필은 돈을 벌기 위해 미국에 가서도 곧바로 미국과 스페인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했으니 말이다.

그 후 서재필은 한동안 인쇄업과 사무실용 가구와 용품을 파는 필립 제이손(Phillip Jaisohn)이라는 문방구를 운영했어.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재필은 미국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기도 했어. 한국평론(Korea Review)이란 잡지를 만들어 우리나라의 독립을 도와주는 역할을 도맡았어. 그 후 양탄자 등을 파는 상점을 열어 사업으로도 꽤 성공했다고 하네.

살림살이가 좀 좋아지다보니 서재필의 마음 속에서 다시 의사를 하고 싶은 욕구가 되살아났어. 1926년부터 다시 의학 공부를 시작하여 몇몇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며 병리학 논문 여러 편을 발표했어. 1936년부터는 다시 병원을 차리기도 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징병검사관으로 일하기도 했지.

“어, 다시 의사를 했네요?”

그래, 서재필이 고생했던 것을 보면 미국 사회도 많이 변해갔던 것을 알 수 있지.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동양인 이민자도 늘고, 미국에서 동양인에 대한 대우도 차츰 좋아졌어. 그래서 한동안 서재필은 미국에서 평범한 의사로 살아갈 수 있었어.

그러다 광복이 되자 미국 군정청 최고정무관이 되어 다시 우리나라로 오기도 했고, 우리나라 대통령 후보로 오르내리곤 했지.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어.

오늘 비빔밥이 참 맛있다. 그치?

비빔밥은 참 좋은 음식이야. 몸에 좋으려면 오메가6와 오메가3의 균형이 맞아야 한다고 그래. 가장 바람직한 배합이 2∼4:1인데 비빔밥이 딱이라고 그러네. 그래서 비빔밥이 맛있나?

윤아, 아빠처럼 비벼먹지 그래.

김응수 (한일병원, 흉부외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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