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사업에 몸바쳐온 독립운동가 - 최정숙
육영사업에 몸바쳐온 독립운동가 - 최정숙
  • 의사신문
  • 승인 2012.05.03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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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및 교육·의료사업에 헌신적 봉사 펼쳐

최정숙(崔貞淑)
최정숙(崔貞淑)은 1902년 초대 제주지법 법원장 최원순의 맏딸로 태어났다. 제주신성여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진명여자보통학교와 경성여고보 사범과에 진학했다.

3.1운동 때 선생은 대한문 앞에서 망국의 한을 다시금 절감하고 복받쳐 오르는 분노를 몇 번이고 억눌렀다. 17세 소녀의 몸으로 선생이 학교에 돌아와 79명에 이르는 소녀결사대 조직에 착수한 것은 이때의 일이었다. 구국운동에는 개인보다 조직의 힘이 크다는 것을 통감한 선생은 얼마 후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33인의 한사람인 박희도(朴熙道)에게 연결되었다.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박희도는 학생봉기의 책임자였던 것이다.

애국열에 불타는 소녀결사대와 같이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선언문 낭독을 신호삼아 대대적인 항일시위운동이 터지고 말았다. 선생이 지휘한 소녀결사대는 미국영사관을 돌아 시가지를 누비고 있었으며, 선생이 일본헌병대에 붙들려 구속된 것은 그날이었다.

선생은 이곳에서 계속 고문을 받다가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졌다. 여기서 시위운동을 하다 들어온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를 처음 만났다. 최은희와 비밀연락을 통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소식을 듣고, 국민 속에 불붙기 시작한 독립운동에의 열기를 들으면서 스스로 위로했다. 선생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1939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고려의대 전신)에 37세의 노처녀로 입학한 선생은 부모의 반대 등 여러 가지 시련을 극복하고 1943년에 졸업하여 여의사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처음 근무지로 경성 성모병원에 부임한 선생은 이화여고의 위생감을 겸하면서 의사면허증을 따고 입원환자들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결핵환자치료와 뒷바라지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그 당시만 해도 결핵은 무서운 전염병으로 알려져 특효약이 없었고 특히 젊은 층이 많이 이환되어 장기 치료를 요할뿐더러 사망률도 높아 일단 걸리기만 하면 패가망신한다는 속설까지 나돌고 있었다.

선생이 정화의원(소아과)을 제주시에서 개업한 것은 1944년이었다. 선생은 극빈환자에게 무료치료를 베푸는 등 의사로서 최선을 다했다. 1945년 설레임과 흥분 속에 광복을 맞은 선생은 그날 밤을 뜬 눈으로 지새며 닥치는 대로 종이와 천을 모아 태극기를 그렸다. 선생에게 주는 조국광복의 의미, 그것은 꿈 많은 소녀시절에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치고 검속·고문·옥고라는 인생 최대의 시련과 고통을 받았던 지난날의 악몽으로 하여 더욱 생생히, 그리고 간절하게 부상되었던 것이다.

선생은 독실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박애와 봉사라는 인생목표를 굳건히 정립하고 독신이라는 외로운 길을 지키며, 모진 비바람과 세속의 유혹을 뿌리치고, 교육을 위해 한길을 걸었던 그 고귀한 생애는 어려운 시대를 헤쳐온 이 땅에 하나의 등불이 되고도 남았다. 유교사상이 지배하던 봉건시대에 여성의 몸으로 개화문명에 눈을 돌려 새로운 교육을 받고 천주교에 귀의하여 교육과 인술로 일관한 값진 생애를 살았다.

신성여고 설립의 토대를 닦고 1953년 학교가 정식 인가되자 초대 교장에 부임하였다. 교육에 대한 공로와 사회 및 의료사업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가 인정되어 가톨릭신자로서는 최대의 영예인 로마교황훈장이 내려진 것은 1955년이었다.

선생은 또 1962년 군사정부로부터 교육에 미친 공로가 인정되어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의 문화포상을 받았다.

이때 정년퇴임으로 학교를 떠날 때까지 대한적십자사 부지사장, 유엔가입 제주도추진위원회 부위원장, 제주도 중등교육회장, 대한결핵협회 도지부장 등을 역임하며 인류애와 국익증진에 기여하고 교사의 권익옹호에 앞장섰다.

1964년 뜻밖의 중책인 제주도교육감에 임명되었다. 교육자치제가 처음 실시됨에 따라 초대교육감에 여성교육자인 선생이 발탁된 것이었다. 이러한 공로로 선생은 1967년 제2회 5.16민족상 교육부문본상을 받았다. 부상으로 받은 1백만 원은 정화장학회를 설립, 가난한 학생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다.

1968년 4년의 임기를 마치고 야인이 되었을 때 선생에게 노년의 육신을 의탁할만한 한 칸의 집도 없어 더욱 주위를 놀라게 했다.

독립운동가로서, 교육자로서, 의사로서 너무나 깨끗이 산 백옥 같은 생애였다.

한 점의 혈육도 남긴 것이 없이 1977년 심장마비로 조용히 영면하니 천수 75세였다. 영면 후 1993년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고려대학교 교우회는 2009년에 `자랑스러운 고대인 사회봉사상'을 수여하였다.

집필 : 이준상(고려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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