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20:55 (금)
한라산 기행〈하〉
한라산 기행〈하〉
  • 의사신문
  • 승인 2012.03.19 11: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노민관 <강동 노민관가정의학과의원>

◇삼각봉 대피소에서 등반대원들과 함께.

흰눈으로 가득찬 넓디 넓은 백록담의 위용에 감탄


노민관 원장
“정신이 덜깬 상태로 아무런 준비없이 걸어오느라, 아직 제대로 오늘을 맞지 못 했었구나 !” 아무런 준비없인, 새로운 하루를 느낄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럴 땐, 정신이 들 때까지 좀 늦게 온 것이 오히려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라오름을 내려와 다시 진달래 대피소까지 급경사 길을 약 20분 올라오니 10시. 주말에 집에 있었다면 이제 일어날 시간인데 산을 다니면서부터 일요일이 가장 일찍 움직이는 날이 되었으니 이것도 나름 큰 수확이다. 성판악부터 3시간. 사라오름을 다녀온 시간을 제하면 작년에 왔던 시간보단 약간 빨리 올라온 것 같다. 7시부터 서둘러 올라온 보람이 있다. 어쩌면 선두는 정상을 갔을 수도 있겠으나, 4시까지 하산하기로 하였으니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다.

일단 홍기석 선생과 느긋하게 도시락과 컵라면을 먹으며 1시간을 푹 쉬고 정상을 향했다. 중간쯤 올랐을까. 저 아래쪽으로 사라오름이 보이고, 소나무과의 구상나무 군락지가 펼쳐진다. 1300m 지점에 군락을 이루던 구상나무가 온난화로 점차 높은 지대로 올라간다고 하니, 나중에는 정상이 구상나무로 덮이게 될런 지도 모르겠다. 이 구상나무가 크리스마스트리의 표본이고, 그 원산지가 우리나라라니 재밌는 일이다.

어느 순간부턴가 구상나무도 없이 흰 눈과 파란 하늘, 간혹 고목만이 보이는 정상지대에 진입하니 러셀을 해놓은 부위 이외로는 걷기가 힘들고, 바깥 부분은 낭떠러지같이 경사가 급해 위험해 보인다. 안전지대로만 걷다보니 정체될 수 밖에 없는, 산객 과밀지구가 자연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뒷사람만 따라가다 보니 어느 덧, 내 머리 아래로 눈이 내려오는 것이 느껴지고, 저 쪽에서 홍기석 선생이 손을 흔들며 반겨준다.

아, 정상이구나! 점심으로 먹은 도시락이 부담스러웠는지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쉬엄 쉬엄 올라왔는데, 홍 선생은 쉬지도 않고 잘도 가더니, 이제서야 조우를 한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10분쯤 앉아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백록담
온도가 너무 내려가면 작동이 안되는 너무 스마트한 폰이라 사진도 못 찍고 있었단다. 때론 물불 안 가리는 무대포가 필요할 때가 있는 법. IT 기계도 탱크처럼 우직한 놈이 때론 필요한가 보다. 그 탱크 같은 나의 덜 스마트한 폰이 마구 위력을 발휘하여 한라산 정상을 마구 훑고 다닌다. 처음엔 정신이 아득하여 백록담이 어딘 지 감이 없더니, 온통 하얀 가운데서도 울타리 너머 저 편이 백록담이구나!

당연, 백록담의 가장자리 높은 곳에 올라야 분화구가 잘 보이는 법인데, 처음 오른 나에겐 orientation이 잘 서질 않는다. 한라산 동능선 정상부 자체가 매우 넓고, 백록담은 울타리를 쳐놓고 접근을 막아놔서 바로 눈에 띄지 않는 탓이기도 했다.

백록담까지는 약 110미터를 내려가야 하고, 그 넓이가 16,000평이라니 그 언저리만으로도 웬만한 산 정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지리산, 설악산의 정상부위는 사실 너무 좁아 산객들이 잠시 머무르기도 힘든 경우가 많은데, 이 곳 한라산 정상은 막아놓았으니 이 정도지, 자유롭게 접근을 허용했다면 인산인해, 눈 반 사람 반, 정말 장관이었을 듯하다. 산객들의 무게로 한라산 고도가 점차 낮아지지 않을까. 심지어 마그마가 끓어오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정상부위의 넓이는 다른 산과는 아예 비교할 수가 없었다.

진달래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는 동안 이관우 선생님 내외분마저 지나가신 터라, 정상에서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어, 아쉬움을 남긴 채 관음사길로 하산을 시작했다. 관음사까지 8.7 Km 현재 시각 오후 1시.


사라오름 지나 최정상 다다르니 시원한 풍경에 정신 맑아져
1만6000평의 백록담 정상에 모인 수많은 등산객 자체가 장관
가파른 하산길 온몸으로 내려오며 한라산 위엄 한번 더 느껴



4시까지는 하산해야하니 3시간 이내에 끊어야 하는데. 거리가 만만치가 않다. 산길은 1시간에 2 Km 정도가 보통 속도인데 다음 대피소에서 점심을 하기로 한 터여서 미리 점심을 먹은 우린 일단 따라잡기만 하면 된다. 하산길은 올라온 길이 가파른 만큼 역시 만만치가 않다. 다져진 눈길도 더 좁고, 경사도도 더 심해 무릎이 뻐근해온다. 나무들도 별로 없는 고지대여서 자연히 걸음걸이가 엉거주춤하고, 여차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한참을 굴러야할 것 같은 위험지대가 한 두군데가 아니다. 경사도가 급하면 잡고 내려갈 수 있도록 끈이나 자일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그런 시설이 좀 미비한 듯하다.

자연친화성(echo-friendly)을 중시해서일까? 일본이 그렇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자연 그대로의 경관을 최대한 유지하다보니 등산객을 위한 시설은 매우 미비하여 사람들에겐 상당히 불친절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옆으로도 내려가고, 기어서도 내려가고, 무릎을 50도쯤 굽힌 채 그야말로 엉거주춤도 내려가고, 거의 누운 자세로 미끄러지듯 내려가고.

어찌어찌 내려오니 삼각봉대피소. 일행들이 식사를 마치고 쉬고 계신 중이었다. 삼각봉대피소는 무인대피소긴 해도,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대피소 중 가장 예술적이었다. 인공물 없이 자연 그대로이면 경관으론 더 좋겠지만, 눈 많은 겨울, 산객들의 지친 몸을 쉬게 해 줄 수 있는 적당한 위치에 나지막한 삼각지붕의 이 대피소는 참으로도 고맙고 너무 이∼뻐 아주 오래 사귄 사람과 헤어지듯 자꾸 뒤돌아보아지는 그런 곳이었다.

삼각봉 대피소를 지나 굴거리나무 같은 나무들이 많이 나오면서, 이젠 거의 다 내려왔구나 싶다. 탐라계곡 대피소에서 잠깐 다리를 쉬곤, 이젠 정말 4시까지 맞추기 위해 내달렸다. 스틱을 세게 찍으며 부족한 다리 힘을 팔로 도와가며 하산지점에 도착하니 3시45분. 2시간 45분에 8.7Km를 내려왔으니 잠깐 쉰 것 빼면 거의 시속 4Km 속도로 걸었다는 얘기다. 내일 아침 무릎이 괜챦을려나? 버스에 오르니 노곤해지면서 식은땀이 나는 것이 저혈당 증세가 오는 듯해 자일리톨 껌을 잔뜩 물었다. 점심을 좀 일찍 먹었나보다. 이후 아무런 간식도 없이 무리하게 하산한 표가 난다. 이젠 해수온천에 몸을 담그고 느긋하게 한라산에서의 9시간을 되돌아보아야겠다.

한라산! 역시 영산이다. 다녀온 지 1주일이 지났는데도 아직 무릎 및 엉치, 팔, - 스틱을 너무 세게 찍으면서 속도를 냈나보다 - 까지 뻐근하다.

역시 내공이 세보이던 두 분은 적토마, 천리마였다고 한다. 2시, 3시에 하산했다고 하니 나보다는 2, 3시간씩 앞섰다는 얘기다. 아마 그 분들은 다리도 별로 아프지 않을테지! 내공도 별로 없으면서 작년에 진달래 대피소까지 갔다 왔다고 너무 쉽게 생각했던 탓도 있을 것이고, 준비없이 맞이한 하루여서 더더군다나 힘들었을 것이고, 등반대장님 말씀대로 산에 대한 경외심이 적었던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크게 각성해야겠다. 아직 못 가본 코스도 많은 만큼 더욱 내실을 기하여, 좀 더 여유 있고 후회 없는 산행이 될 수 있길 바래본다.

노민관 <강동 노민관가정의학과의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