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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니라 머리로 일해요 - 요한 페터 프랑크
몸이 아니라 머리로 일해요 - 요한 페터 프랑크
  • 의사신문
  • 승인 2012.03.05 1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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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이 의료경찰로 활동, 공중위생 감시해야”

의사는 뛰어난 경찰이어야 한다는 의사 - 요한 페터 프랑크(Johann Peter Frank)

아빠가 옛날에 태어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빠는 허준 같은 의사가 되었을 거예요,”

우리 윤이, 아빠 점수를 후하게 주네. 의사 허준이야말로 얼마나 훌륭한 분인데….

그러고 보니 말이다. 참, 사람이 시대에 맞추어 태어나는 것도 어려워.

손 씻기를 밥 먹기만큼 강조한 제멜바이스도 그렇고,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요한 페터 프랑크라는 의사도 그래.

때는 바야흐로 18세기 중반,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역에서 유달리 체중이 작은 아이가 태어났어. 그 사람이 누구냐? 바로 요한 페터 프랑크지. 프랑크의 엄마는 손바닥만한 아기를 보곤 며칠 동안 눈물을 흘렸다나.

프랑크가 살던 지역은 프랑스와 독일이 전쟁을 치를 때마다 국경이 변하는 지역이어서, 요한 프랑크의 할아버지는 프랑스 사람이었으나 프랑크는 독일에서 의학을 공부했어. 하여튼 지금은 독일 땅이야.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작았던 프랑크는 어렸을 때 아주 약골이었어. 어머니는 프랑크가 제대로 자라 사람 노릇이나 할까 걱정했대. 초등학교를 다닐 쯤엔 나흘이나 열이 펄펄 끓어 어머니는 혼자 중얼거렸대요.

“이젠 드디어 프랑크가 죽는구나.”

그런데도 프랑크는 툴툴 털고 살아났어. 유명한 의사가 되려면 이렇게 어릴 때부터 아파야 하는 거야. 아빠도 그랬잖아.

“아빠도 그랬어요?”

응∼, 아빠도 늑막염에 걸려 한 해를 쉴 정도로 심하게 아팠지. 아빠가 프랑크처럼 유명한 의사는 아니지만….

웬일인지 아버지는 프랑크가 무역상이 되기를 바랐대. 반면에 프랑크의 어머니는 허약한 프랑크가 목사가 되어 고생을 덜하길 원했대. 결국 프랑크는 어머니의 뜻대로 라틴어 학교를 거쳐 신학교에서 중등 교육까지 받게 되지.

그 뒤 프랑크는 공무원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열여덟 살 때 하이델베르크의대에 입학하게 돼. 그러나 고리타분한 강의에 실망한 나머지 공부를 잠시 중단하기도 했어. 

의사가 된 뒤 두 해 있다가 고향으로 옮겨갔는데,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가 애를 낳다 죽고, 아기마저도 몇 달 안에 죽어버렸어.

“나는 왜 이리 불행할까?”

프랑크는 몇 주 동안 먹지도 않고 눈물을 흘렸다고 해. 이러한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 프랑크는 공중보건에 대한 백과사전 같은 책을 쓸 생각을 했다고 하네.

그러나 그 즈음 프랑크는 이미 온 유럽에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되어 있었어.

“무조건 피를 뽑는 치료는 당장 멈추어야 해요.”

내 참, 그때는 고갈치료라고 하여 사람의 피를 뽑아 치료했단다. 프랑크는 당시 유행하던 이러한 치료에 반대해 적절한 영양을 공급해야 사람이 살 수 있다며 캠페인을 벌였어. 이를 위해 프랑크는 직접 간호사들을 교육시킬 학교를 만들었고, 오스트리아 황제의 명령으로 프랑크가 지은 시민병원을 유럽 최고의 병원으로 만들었어.

그런데 그때 요제프 2세는 화려한 병원을 원했대요. 프랑크는 겉만 멀쩡한 큰 병원 짓기를 반대했어. 프랑크는 이렇게 말했다지.

“커다란 시계는 무거운 추가 톱니바퀴를 돌리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덩치 큰 병원을 왜 그리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드디어 프랑크는 서른네 살 때 그 유명한 의료경찰에 대한 책을 내게 돼. 그 책은 프랑크가 십년 이상 준비했는데, 출판사를 찾는데도 몇 해가 걸렸어. 그 정도로 책의 내용이 권력자들의 눈에 거슬리는 게 많았다는 거야.


아내와 아이 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공중보건에 심혈
병원 건축가·행정가로도 유명…러시아 황제 주치의로 활동


요한 프랑크는 사회가 발전하려면 의사들이 경찰처럼 위생을 감시해야 한다고 말했어.

“그럼, 경찰은 뭘해요?”

글쎄 말이다. 그 당시는 워낙 더러운 환경에서 살았으니까 위생을 짜임새 있게 관리하는 역할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말했던 것이겠지.

병원 건축가로도 이름난 프랑크는 많은 병원을 새로 짓는 데 관여하였지. 제네바의 대학병원을 짓기도 하였고, 이탈리아에 있는 제노아병원, 오스트리아에 있는 비엔나병원을 개혁하기도 하였어.

“이렇게 주먹구구로 해서는 안돼요. 병원 통계나 기록은 정확해야 해요.”

당시는 내과와 외과의사의 교육이 따로 나누어져 있었어.

“내과를 공부하는 학생들도 외과 강의를 들어야 해요. 외과의사가 되려는 사람도 당연히 내과를 공부해야죠.”

어느 해 천연두라고 부르는 두창이 유행하자 프랑크는 제너가 주장했던 우두 접종법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었지. 다음해 결국 오스트리아 정부가 프랑크의 제의를 받아들여 천연두에 대해 예방주사를 맞으라는 법령을 발표했어.

그런데 그게 문제였어. 프랑크가 유명해질수록 시기하고 질투하는 의사들의 숫자는 날로 늘어났어. 힘을 가진 정치가와 고리타분한 공무원까지 프랑크를 이리저리 따라다니며 괴롭혔어.

게다가 프랑크에 대한 종교계의 비난은 버티기 힘들 정도로 극심했어. 당시 프랑크는 오스트리아에서 금지된 종교단체*에 가입한데다 자신의 책에서 타락한 성직자를 날카롭게 비판했기 때문이었지. 그러다 보니 오스트리아 최고의 명의가 다른 나라로 추방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 거야.

“아빠, 프랑크가 큰일 났어요.”

1804년 요한 페터 프랑크는 오스트리아 황제를 만났어. 프랑크가 러시아로 떠나려는 것을 알고 불쾌한 황제가 말했지.

“당신이 훌륭한 의사인 줄 알지만 솔직히 러시아로 가건 말건 상관없소. 공부만 한 사람들이란 어떻게 대우할지 도통 모르겠어. 조그마한 말에도 당신들의 머리는 금방 파르르 떤단 말이오.”

그러자 프랑크는 황제에게 정중하게 대답했어.

“그것은 몸이 아니라 머리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참, 아빠는 병원에서 늘 몸으로 때우는데 말이야. 하하∼∼.

프랑크는 삼년 동안 러시아 황제의 주치의로 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도와달라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의사를 그만 둬 버렸어. 이제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데도 지쳤고, 약골이었던 프랑크가 통풍을 앓으면서, 건강이 더욱 나빠졌기 때문이었지.

결국 프랑크는 몇 년 후 죽게 돼. 프랑크라는 슈퍼스타가 죽은 후 프랑크의 위생에 관한 제안들은 모두 묻혀 버렸지. 몇 십 년이 훌쩍 지나버렸어. 19세기 중반에서야 다시 공중위생이 강조되면서 프랑크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나. 한 세기 정도 일찍 태어난 게 요한 프랑크의 가장 큰 잘못이었지. 왜 일찍 태어났을까? 참∼.

비엔나에 가면 프랑크가쎄(Frankgasse)라는 거리가 있어. 이 거리 이름이 오스트리아에 위생법이 있게 만든 요한 페터 프랑크를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래. 오늘같이 우중충한 날엔 프랑크가쎄에서 비엔나커피나 한잔 하고 싶어. 

그런데, 윤아! 비엔나 커피가 왜 유명한 줄 알아? 17세기 오스트리아가 오스만투르크를 물리쳤을 때 아랍에서 유행하던 커피가 유럽으로 처음 넘어와 바로 비엔나에서 커피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야. 아 참, 윤아! 쇤브룬 궁전의 뒤뜰에서 마셨던 비엔나커피도 정말 맛있었는데…, 그치?

*금지된 종교단체, 프리메이슨(Freemason)

프리메이슨리(Freemasonry). 1717년에 영국 런던에서 만들어진 중세 석공들의 조직인 길드를 모체로 생겨난 단체로 채석공의 연장과 용구를 상징으로 사용한다. 처음에는 석공들의 친목도모와 교육이 목적이었으나 17세기에 들어서 영국에서 사회 개선을 추구하는 엘리트들의 남성전용 사교클럽으로 발전했고, 18세기 중엽 영국 전역으로 확산되었을 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까지 퍼졌는데, 이때는 이미 석공들만이 아닌 지식인, 중산층과 청교도 등을 포함한 조직이었다.

점차 현실적인 문제뿐 아니라 윤리나 도덕 같은 종교적 색채의 행동강령이 더해지자 가톨릭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기 시작했고 비밀결사의 성격을 띠게 됐다. 프리메이슨은 세계 시민주의적 입장에서 관용의 정신과 도덕심, 자선, 박애정신을 강조하고, 세계 단일정부를 지향하고 종교적인 자유와 관용을 중시한다.

요한 페터 프랑크(Johann Peter Frank)

1745년 3월 19일 출생하여 1821년 4월 24일 사망했다. 오스트리아 의사, 공중보건의 선구자로 현재 독일 땅인 바바리아의 로달벤에서 태어나 스트라스부르에서 공부하고, 1766년 하이델베르크대학을 졸업하였다. 1784년 괴팅겐대학 교수를 거쳐 1786년 파비아대학 교수 겸 병원장을 역임하였다. 1795년 빈대학 교수 겸 제1병원장이 되어 빈대학의 의학교수법을 개량하였다. 1804년 러시아 황제의 주치의로 임명되었다.

대표적 저서 《의학적 경찰 》(9권, 1779∼1827)은 공중위생에 관한 최초의 광범위한 내용으로 근대 공중위생학의 확립자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독일에서는 19세기말까지 법에 따라 공무원들이 공중보건 행정을 수행했다. 1821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죽었다.

김응수 (한일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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