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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할 심산인가
작별할 심산인가
  • 의사신문
  • 승인 2012.02.23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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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은 아니지만 향은 제철의 꽃과 다름없다. 살마금은 새 촉의 잎 무늬 변화가 예쁜 난이다.
살마금이 또 꽃대를 올렸습니다. 마치 작별 인사를 하듯 조용히 올라와 4 송이의 꽃을 피우고 제법 근사한 향을 풍깁니다. 살마금은 사계란 또는 적아소심이라는 품종의 난에서 나타난 변종입니다. 새 촉이 올라올 잎이 아침 햇살처럼 환하게 흰색에 가까운 색을 띱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녹색이 차 올라와 잎 끝에 무늬를 남깁니다. 환경에서는 가을에 꽃을 피웁니다.

3년 전 봄 병원 행사에 축하용으로 배달된 것을 받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난을 키우던 사무실 창가 자리는 아침 햇살이 제법 강한 곳이었고 가끔은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도 쐴 수 있어 난이 자라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살마금은 창가에 적응을 하며 새 촉을 여럿 올렸습니다. 그런데 여름이 다가오면서 냉방이 시작되자마자 6월부터 연신 꽃대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보름도 안 되는 짧은 여름을 지내고 냉방기에서 나오는 냉기를 가을로 착각해 그해 가을이 깊을 때까지 무려 4번의 꽃을 피우면서도 새 촉도 잘 키워낸 튼실한 난입니다. 거름도 부족하지 않게 주었고 물도 때맞추어 잘 주었지만 그 때부터 계절을 잊은 듯합니다.

지난해에도 봄에 씩씩하게 새 촉을 올리고 여름이 시작되기 전부터 꽃을 피우더니 가을이 되면서 잎 끝이 검게 타기 시작했습니다. 이사한 새 사무실은 난이 해를 볼 수 있는 자리가 없어 내내 형광등 빛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거기다 여름엔 냉방, 겨울엔 온풍이 도는 곳이니 어느 순간 계절을 완전히 잊을 수밖에 없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 분갈이를 했습니다. 화분 속은 뿌리가 빼곡하게 차 있어 난석을 하나씩 빼낸 끝에 겨우 화분을 분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썩어버린 뿌리를 가위로 잘라내고 깨끗한 물로 헹구었습니다. 화분과 새로 구입한 돌도 물에 담가 돌가루를 씻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난을 두 덩어리로 나누었습니다.

화분 맨 아래에 엄지손톱만큼 굵은 난석을 깔고 난을 앉힌 다음 새끼손톱만한 돌을 채우며 뿌리를 고정시켰습니다. 그리고 화분 윗부분에 콩알만한 난석으로 올려 마무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난석이 흩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을 여러 번 부으니 난석에 남아 있던 돌가루들이 흙탕물이 되어 흘러나옵니다. 그렇게 맑은 물이 흘러나올 때까지 물을 부어 화분 속을 씻어냈습니다. 그렇게 살마금은 두 개의 화분에 옮겨져 자리를 잡았습니다.

비록 안타까운 환경이지만 부족하지 않게 비료도 올려놓고 건조한 실내에서 화분 속이 건조해지지 않도록 잘 살피며 물을 주었습니다. 올 봄 다시 새 촉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잎이 몇 개 누렇게 변하면서 꺾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보름 정도 물주기를 잊고 있었습니다. 색 변한 잎을 잘라내고 물을 주려다 보니 문득 꽃대가 올라와 있습니다.

난이 약해질 대로 약해지면 어느 날 꽃대를 여럿 올리고 꽃대마다 두어 송이의 꽃을 피웁니다. 제 생명이 다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어떻게 하든 제 유전자를 남기고자 하는 몸부림이니 꽃이 지고나면 난도 시름시름 집니다.

그래도 살갑게 살핀 은혜를 갚으려는 심산인지 아침 10시쯤이면 맑은 향을 뿌립니다. 며칠 후 꽃이 지기 전 꽃대를 자르고 분갈이를 다시 해야 하겠습니다. 화분 속에서 뭔가 사단이 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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