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마지막 날 어머니께서 떠나신 후 잠시 방황 아닌 방황을 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짧은 여행도 다니고 오랫동안 손을 놓고 있던 붓도 다시 잡았지만 어머니의 빈자리는 여전히 큽니다. 아직 아버지 계셨던 자리도 여전히 크게 비어 있는지라 허전함이 더 합니다.
지난 추석 때 청주 사는 동생 집에 갔다가 오래전에 스치듯 우연히 만난 시인의 서재를 찾아갔습니다. 조용한 주택가에 작은 방을 하나 얻어 글을 쓰고 있는 그는 나이는 어리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나보다 세상 이치를 더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그와의 대화는 늘 즐겁습니다.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어머니 가신 후 먹을 갈고 글씨를 쓰며 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자 그는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잘 아는 서예가가 한 분 계시니 인사나 드리러 가자고 일어섭니다. 그렇게 얼떨결에 또 한 분과 인연이 닿았습니다.
그렇게 만난 운당 이쾌동(芸堂 李快東) 선생이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작품전을 열었습니다. 찾아간 날 전시장은 한산 했습니다. 방해 받지 않고 가까이 다가서기도 하고 뒤로 물러서기도 하며 둘러보았습니다.
추상화를 감상하는 것만큼이나 서예 작품 감상도 부담스럽습니다. 한자를 잘 알지 못하는데다 물처럼 흐른 행서는 더욱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예서나 전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작품집에 간략하게 덧붙여 둔 해설을 읽으며 글의 뜻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액자 하나와 족자 하나가 가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마침 외출에서 돌아온 운당 선생과 나란히 앉아 다른 사람이 찾아올 때까지 짧지 않은 시간 보내며 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도 차마 그 두 작품이 마음에 담겼다는 말씀은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뒤 며칠 동안 도록의 두 작품을 보고 또 보며 마음을 태웠습니다. 내 마음이 참 허한 모양이라고 넋두리를 해도 이 두 작품이 도무지 떠나지 않습니다. 결국 청주의 시인에게 기별을 넣어 두 작품을 손에 넣었습니다. 액자 작품은 하나는 사무실에 족자는 집에 두었습니다. 문득 바라볼 때마다 흐뭇합니다.
천여 년 전 한 스님이 도를 깨닫고 남긴 시라 합니다. 그 깊은 뜻을 다 짐작하기에는 내 생각이 너무 짧습니다. 그런데도 볼 때마다 마음이 한 없이 편안해집니다. 햇살 따뜻한 어느 산골의 밭에서 솔숲을 지나와 사오락사오락 댓잎 스치는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山前一片閒田地 (산전일편한전지) 산자락 한가론 밭 한 뙈기
叉手컞問祖翁 (차수정녕문조옹) 공손히 노인장께 물었네.
幾度賣來還自買 (기도매래환자매) 팔았단 되사고 팔았다가 또 되산 건
爲憐松竹引淸風 (위련송죽인청풍) 대숲과 솔숲에 이는 맑은 바람 때문이라.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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