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20:55 (금)
조막손 의사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 노구치 히데요
조막손 의사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 노구치 히데요
  • 의사신문
  • 승인 2011.09.08 14: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어도 미래는 바꿀 수 있다”

하루 세 시간도 자지 않고 노력한 의사 -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

미국의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 중에 장애인 투수가 있었지. 그 이름은 짐 애보트(James Anthony Abbott). 태어날 때부터 오른 손이 없던 짐 애보트는 야구선수가 되기 위해 밤낮으로 벽돌 벽에 공을 던지며 혼자 연습을 했다고 하네. 오른 손목으로 야구 장갑을 옮기고 왼손으로 공을 던지는 기술을 개발해 메이저리거 투수가 되어 노히트노런이라는 보통사람도 하기 어려운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어. 한손으로 안타도 쳐냈고, 서울올림픽의 결승전에서 미국의 선발투수로 나와 미국팀을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지.

이번에는 짐 애보트와 비슷한 조막손 의사 노구치 히데요가 주인공이야. 노구치는 19세기 말에 아주 가난한 농삿군의 아들로 태어났어. 돌이 갓 넘었을 때 어머니가 농사일로 나간 사이 화롯불에 넘어져 왼손에 화상을 입고 그만 손가락이 엉겨붙었지 뭐야. 그래서 노구치의 어릴 때 별명도 바로 ‘조막손’이었어.

“야, 돈가스다∼∼”

이야기를 듣다 말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니 우리 윤이 돈가스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정말 그렇지, 독일에서도 슈니첼을 좋아했었잖아?”

“어? 돈가스가 슈니첼이에요?”

그래, 돈가스는 독일, 오스트리아의 슈니첼이 일본으로 들어오면서 조금 바뀐 거야. 아빠도 슈니첼과 함께 마시던 진한 맥주가 생각나네. 우리나라 만 원짜리 종이돈에는 세종대왕이 그려져 있지. 그러면 우리나라의 만 원짜리와 비슷한 일본 천 엔짜리에는 누가 그려져 있을까?

바로 조막손 의사 노구치 히데요야. 지금도 일본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의사로 도쿄에 있는 우에노 공원에 동상이 있어.

“어? 우에노 공원에 누구 동상이 있더라?”

야, 우리 윤이가 노구치만큼 똑똑하구나. 독립투사 윤봉길 의사 동상이 노구치 히데요 동상 가까이 있어.
가난한 노구치가 '조막손'이라고 놀림을 받으면서도 공부는 맨날 일등만 하니 노구치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몹시 많았대. 노구치는 쇠똥에 머리를 처박히는 괴롭힘까지 당할 정도로 왕따였다고 하네. 그래서 학교 가는 길목에 쪼그려 울 때도 많았대.

"나도 지지 않을 테니까 너도 지지 마라."

그때마다 노구치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학교를 가지 않겠다던 노구치를 야단쳤대요.

“어?, 아빠 눈에서 눈물이 나려고 해요.”

그래, 노구치가 너무 불쌍하지. 그러나 노구치가 어디 그 정도로 그만둘 사람이니? 노구치는 단 한 마디 했다고 그러네.

“공부만 잘 하면 되지 뭐.”

노구치는 스스로 공부하여 영어와 독일어를 원어민처럼 말할 수 있었다고 해. 당시 노구치가 살던 일본에서는 의과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의사가 될 수 있었어.

노구치는 도쿄로 온 바로 그해에 남들은 십년 이상 걸리는 의사 시험을 바로 합격해 버렸다고 해. 노구치가 공부법은 아직도 일본에서는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지. 노구치는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자지 않고 공부만 했대. 그만큼 성실했다는 뜻이야. 노구치의 원래 이름은 ‘세이사쿠’였으나 소설책에서 세이사쿠가 똑똑하지만 게으른 인물로 나오는 것을 보곤 당장 이름을 히데요로 바꿀 정도로 게으른 것을 싫어했어.


어릴적 화상으로 왼손장애 불구 세시간만 자며 고학으로 의사돼
28세 때 매독균 발견 명성…일본서 가장 존경받는 의사로 추앙



그러나 노구치는 일본에서 자리를 얻을 수 없었어. 도쿄대학 같은 대학을 나온 의사들이 일본을 꽉 잡고 있었기 때문이지.

“대학도 나오지 않은 놈이 연구는 무슨 연구?”

그러던 어느 날 노구치에게 기회가 왔어. 미국의 의사 사이먼 플렉스너가 일본에 왔다가 미국인처럼 영어로 말하는 노구치를 보고 놀랐어.

“정말 뛰어난 의사구나. 네가 필요하면 부탁해.”

미국인 의사는 곧 잊어버렸지만, 며칠 뒤 ‘똑, 똑’ 노구치가 플렉스너 교수의 방문을 두드렸던 거야. 플렉스너는 노구치의 집념에 반해 조수로 발탁하게 되었지. 노구치는 일본을 떠나며 멋있는 한 마디를 했어.

"과거는 바꿀 수 없어도 미래는 바꿀 수 있어."

미국에서도 노구치는 세 시간 이상 잠자지 않았어. 그래서 사람들은 조막손 노구치를 ‘세 시간’이라는 별명으로 바꿔 불렀다고 해.

“아빠! 세 시간만 자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요?”

글쎄, 말이다. 아빠도 어렵겠는데……. 하루는 플랙스너가 방울뱀 독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삼년 안에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어.

“스승의 은혜에 꼭 보답해야지.”

노구치는 단 여덟 달만에 치료제를 만들어 스승과 미국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어.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했어.

“역시 노구치구나!”

그래서 스무 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동양인으로 처음 록펠러 의학연구소의 수석 연구원이 되었지. 이곳에서 노구치는 매독균을 발견하였는데, 매독은 당시 정신병의 절반을 차지하던 마비를 일으키는 무서운 병균이었지. 노구치는 매독균을 발견하여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면서 노벨상 후보로도 올랐어. 그러나 노구치는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노벨상을 받질 못했대. 더욱이 그때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나라였잖아. 우리 윤이, 답답하지?

노구치가 잠시 일본에 들렀을 때가 있었어. 당시 요코하마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노구치를 환영했는데, 너무나 열광적이어서 '노구치 열기'라고 불렀다고 그래. 그러나 많은 의사들은 뒤편에서 노구치를 의심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대.

1920년 노구치는 황열병* 백신을 만들었지만 효과가 별로 없었어. 그런데 노구치의 머리에 갑작스런 생각이 떠올랐어.

‘황열병이 두 가지 종류가 있을 거야. 그래서 내가 만든 백신이 듣지 않는 것이 아닐까?“

호기심은 결국 노구치를 아프리카로 달려가게 했지. 노구치는 아프리카에서 수백 마리 원숭이로 황열병을 연구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안타깝게도 노구치도 황열병에 걸리고 말았어. 노구치는 높은 열로 인해 의식이 희미한 상황에서 마지막 말을 남겼다네.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쉰 한 살 밖에 되지 않는 아까운 나이였어.

하지만 노구치가 죽은 다음에 노구치에 대한 평가는 나쁘게 바뀌지. 왜냐하면 노구치가 발견한 소아마비, 광견병, 황열병 같은 병을 일으키는 병원체는 세균이 아니라 바이러스로 밝혀진 것이야. 당시에는 전자현미경이 발명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보통 현미경으로는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었어.
그렇다면 노구치가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노구치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빠, 무엇이었어요?”

음∼, 아빠도 정말 궁금해.

*황열병(yellow fever)
황열 바이러스가 병원체로 쿠바의 의사 카를로스 핀레이(Carlos Finlay)가 모기에 의한 바이러스의 매개로 인한 감염이라는 것을 처음 주장했다. 미군 군의관인 월터 리드(Walter Reed)가 파나마 운하 건설 때 모기 방역으로 황열병을 막아 핀레이의 이론이 옳다고 증명하고, 1901년 황열 바이러스를 발견하였다. 일본의 세균학자인 노구치 히데요는 황열 연구를 하다가 황열병에 걸려 사망했으며, 이후 남아프리카 출신의 미국 미생물학자 막스 타일러(Max Theiler)가 황열 백신을 개발하여 1951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김응수 (한일병원 원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