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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츠의 차들 <2>
벤츠의 차들 <2>
  • 의사신문
  • 승인 2011.05.19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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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111 성공으로 1970년대 들어서 라인업 구축

지난번에 적었듯이 2차 대전의 충격은 유럽에 오래 남아 있었다. 전쟁에 진 독일은 1950년대까지 복구하지 못한 시설들이 널려있었고 이기기는 했으나 폭격을 겪은 영국은 1960년대까지도 흔적이 도처에 남아있었다.

산업시설의 피해도 컸고 종사하던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한 경우도 허다했다. 전쟁이 끝나자 새로운 질서가 나타났다.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그것이 질서였다. 석탄의 패러다임을 갖던 유럽의 질서에서 석유의 패러다임을 갖는 미국으로 변했다. 사실상 석유는 미국의 힘이었다. 석유는 한편으로 많은 에너지를 의미했고 많은 소비를 의미했다. 어찌보면 과잉이나 잉여에 가까운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에너지는 전후의 새로운 소비패턴을 의미했다. 대중들이나 중산층도 많은 에너지를 쓸 수 있다는 새로운 체제, 그러니까 대량의 소비를 의미한다. 대량소비는 결국 대량생산을 의미했고 전쟁후부터 지금까지 지속된 패턴이다.
 
전쟁이 끝나고 유럽에서 나온 차종은 아직 석유가 흔해지기 전의 패러다임을 반영했다. 사실 유럽의 사정은 매우 안 좋았다. 1914년에 이전에는 엄청난 빈부 격차가 그 다음은 5년간 전쟁이었고 전쟁이 끝나고 잠시 좋아지는 듯 했으나 사회는 대단한 불안감이 돌면서 기존의 모든 패러다임은 붕괴됐다. 그 다음은 대공황, 파시즘과 나치즘의 대두, 공산혁명의 영향같은 것들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다가 다시 전쟁 그리고 1950년대까지는 궁핍의 연속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대량의 소비는 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라인강에 다리가 없어 사람들이 케이블에 보트를 걸고 도하하던 시절이 몇 년이나 지속되었을 정도로 파괴가 극심했지만 1950년대가 되자 부유한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좋은 차를 사고 싶어 했고 많은 사람들은 프리미엄 차종이 벤츠를 떠올렸다. 지난번에 적은 폰톤도 그런 맥락에서 사람들이 무척 사고 싶어 하던 꿈의 자동차였다. 지금 생각하면 30∼50마력대의 차로 1970년대의 택시 수준이지만 당시에는 사치품이자 하나의 목표였다. 1950년대에는 폰톤 같은 차들이 독일의 럭셔리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1800cc의 벤츠가 사치품이라는 사실은 다른 차종과 비교하면 명백해진다. BMW에는 정말 궁핍하던 시절 시트가 1열인 차가 생산됐고, 폭스바겐의 비틀도 다시 생산이 되었으며 시트로엥의 2CV같은 차도 생산됐다. 그리고 피아트 500같은 차들도 있었다. 피아트 500은 500cc 정도의 엔진에 500Kg 정도의 무게 그리고 50km/L에 근접하는 성능을 내는 13마력 정도의 엔진이었다. 2CV는 9마력에서 13마력 정도였다.

벤츠의 디자인은 1960년대가 되자 폰톤에서 헤크플로스(Heckflosse)라는 디자인으로 변한다. 영어로는 fintail이라는 물고기 지느러미 모양의 디자인인데 미국에서 대유행을 하던 디자인이었다. 차는 W110이라는 디자인으로 출하됐고 비슷한 시기에 W111이라는 디자인의 더 큰 차가 출하됐다. 이전의 모델 폰톤은 사실 1940년대의 미국차를 바탕으로 설계한 것이고 W110과 W111에 와서야 벤츠는 자신의 디자인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W110은 E 클래스의 직접적인 조상이고 W111은 S 클래스의 원조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미국의 테일핀 차들과 벤츠의 차이를 말하자면 배기량과 마력의 엄청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Buick LeSabre 같은 차들은 최고급 모델이 아니지만 5L 배기량에 250마력 정도의 출력을 냈고 얼마후에는 300마력대로 올라갔다. 다른 모델들도 마찬가지였다.

벤츠를 포함한 유럽의 차들은 중형클래스의 4실린더 m121 엔진이 대표적인 예로 처음에는 폰톤의 1.8L였다가 나중에야 2L로 올라갔다. 그리고 om621이라는 디젤 엔진버전이 언제나 2배 정도 더 많이 팔렸다. 대형차에는 직렬 6실린더 엔진을 탑재했는데 1951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엔진 디자인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물론 벤츠의 명명법은 언제나 혼동스럽다. 1960년대 말까지 생산된 이 모델들은 요즘과는 반대의 표기법을 썼다. 220S, 220SE, 230S, 280SE 같은 이름이 붙었다.)

벤츠가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자 S클래스의 조상에 해당하는 W111을 설계하면서 새로운 개선점들을 추가할 수 있었다. 폰톤의 베이스를 더 넓히고 약간 누른 듯이 보이는 설계가 도입되어 차체를 안정화시키고 시야를 더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 차체의 디자인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전반적으로는 테일핀디자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결정적인 개선은 크럼플존과 안전벨트의 도입이었다. 크럼플존의 개념은 차체가 우그러지면서 운동에너지를 확보하면 탑승자의 안전이 개선된다. 안전벨트는 그 당시까지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두 가지 개선으로 폰톤 시절보다 사고시 사망률은 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벤츠는 W111에서 어느 정도 규모의 경제성을 달성할 수 있었다. 거의 1970년에 이르러서야 차의 라인업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수공업 수준으로 만들거나 소량생산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사람들이 벤츠를 대단한 회사라고 생각하고 차들의 가격도 비싸지만 사실 경제성 규모의 생산에는 많이 미달된 것이 사실이었다. 차들이 어느 수량 이상이 생산되어야 단가의 인하나 생산시간의 감소같은 것을 추진할 수 있었다. 다른 독일차들은 아직 넘보기도 힘든 벤츠였지만 라인업을 구축할 때까지 20년 이상이 걸린 셈이다.

1960년대 중반이 되자 W108을 만들어 낼 수 있었고 이 차종은 오늘날의 S클래스의 컨셉에 근접하는 요소가 보이기 시작한다. 사실 클래스라기보다는 엔진의 실린더로 구분하는 경우가 더 흔했다. 4실린더 MB, 6실린더 MB 그리고 8실린더의 차종들로 구분하는 방법도 있었다. 물론 차종의 W번호는 중복됐다.

안윤호〈송파 대광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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