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중보건학의 선구자 김창세(金昌世)는 1893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김승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평양에 있는 장로교소학교와 일본 동경에 있는 학교를 졸업한 후 1910년에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평안남도 순안에 있는 제7안식일병원에 근무하다가 중국 상해에 있는 홍십자회병원(안식교에서 지원 운영하는 병원)에 근무하였다.
외과수술을 잘하며 중국인 및 서양인 의사들로부터 신임과 존경을 받은 그는 상해에 있는 동포들의 진료에 힘썼으며, 상해임시정부 산하의 적십자회 결성에 기여하였고,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보건교육에 힘썼다. 일본 치하에서 억압받던 국민들의 위생문제를 해결하려는 큰 뜻을 품고 도미, 존스홉킨스보건대학원에서 1925년에 보건학박사를 받았다.
한국의사로서 최초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논문은 우리 국민의 식생활 개선의 일환으로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녹두콩을 주제로 하였다(녹두콩에 대한 화학 및 생물학적 연구 : Some chemical and biological studies of the Mung bean, Phassolus Aureus Roxburgh).
박사학위를 마친 김창세는 유럽 13개국의 위생상태를 시찰한 후,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수개월 간 연구한 후 귀국하였다.
1925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국내 최초로 위생학교실(현 예방의학교실)을 창설하여 주임교수를 맡아 국민의 건강증진과 후학 양성에 기여하였다.
그는 제자 양성과 연구 뿐 아니라, 국민을 위한 건강강좌, 간호사를 위한 특강, 잡지 기고 등을 열심히 하였다. 1927년에는 활동무대를 중국으로 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펴기 위하여 부인과 네 자녀를 상해에 두고 1931년에 도미하였으며, 뉴욕에 거처를 두고 사회활동과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리하던 중 반독립운동자로 협박과 폭력에 시달려서 신경쇠약증세를 보여 치료를 받던 김창세는 1934년에 41세로 의문의 최후를 맞았다.
집필 : 유승흠(연세의대 명예교수)
공중보건학 기틀 마련…위생교육·독립운동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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