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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해부학 실습의 추억과 숭고한 기증에 대한 단상
첫 해부학 실습의 추억과 숭고한 기증에 대한 단상
  • 의사신문
  • 승인 2011.04.13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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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신문 창간 51주년 기념수필 - 어떤 증명서 (김애양 강남 은혜산부인과의원장)

김애양 원장
입학을 하자마자 누군가가 말했다. “저기에 해부실이 있대.”

의과대학 건물은 회색빛 돌벽에 박공지붕을 이고 중앙에 시계가 달린 3층짜리였다. 세상의 대학을 대표하듯 이지적이고 단정한 모습이었지만 해부실 소리를 들은 후부턴 그곳은 머리털이 삐죽삐죽 일어서도록 공포를 자아내는 장소가 되었다. 비라도 흩뿌려지는 날이면 공동묘지가 연상되어서 멀리 돌아가곤 했다. 교정 곳곳에 목련화가 피어날 때에 유독 그 앞의 목련은 원혼이라도 서린 듯이 자주빛깔 꽃을 피워서 기괴함을 보탰다.

예과 2년을 마치고 비로소 첫 해부학 실습이 있던 날이었다.

때는 3월, 아직도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아 신촌 골 매서운 바람이 스치던 때.

우리 학년 60명은 해부학 교실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태껏 감히 얼씬도 해보지 못했지만 더 이상 피할 수가 없는 곳. 의학의 진수를 배운다는 자부심이 서린 그 곳으로.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실습복은 수술복처럼 앞이 막히고 뒤에서 묶게 생겼는데 누리끼리한 무명천이었다. 머리엔 모자를 쓰고 수술용 고무장갑도 끼었다. 조교선생님의 인솔 하에 계단에 일렬로 서서 대기하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숙연함과 경건함 속에 자신의 심장고동소리만 귓전에서 느낄 뿐이었다. 선배 중에는 해부학 첫 실습 이후에 다시는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거나, 아예 정신병원에 입원해 버린 이의 소문도 나돌지 않았던가?

드디어 문이 열리고 우리들은 발자국 소리를 줄인 채 입실을 했다. 남쪽 창으로부터 햇살이 가득 차올라 여느 교실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단지 내부 구조가 색다를 뿐이었다. 너른 공간에 실습대만 놓여 있었다. 큰 침대 크기에 허리 높이쯤 되는 시멘트 실습대는 한쪽 모서리로 액체가 수월하게 흐르도록 표면이 경사져 있었다. 우리는 6명이 한조를 이루어 테이블을 둘러싸고 자리를 정해서 섰다.

이윽고 해부학 교수님과 교목님이 들어 오셨다. 학점이 인색하기로 유명한 교수님은 작은 키에 검은 테 안경을 쓰신 모습이 깐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첫 수업 전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전통으로 내려져 왔다. 목사님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우리가 주검을 다루어 비록 인간에 대한 외경심을 외면하는 순간이 있더라도 이 모든 것을 신께 영광을 돌리는 데에 쓰이도록 해주십시오.”

어디선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덩달아 울고 싶었지만 감정의 표현조차 용납이 안 될 것 같았다. 그 무거운 공기. 그 중압감. 나도 도망치고 싶었다. 다만 입술을 꼭 깨물어 보았다.

예배가 끝나고 실습이 시작되었다. 각조마다 한 구씩의 시신이 배정되었다. 우리는 그걸 카데바(cadever)라 불렀다.

실습실 한 곳에는 흡사 큰 욕조 같은 창고가 있었다. 나무 뚜껑에다 튼튼한 자물통이 붙어있는 그 안에는 포르말린액에 여러 구의 시신들이 담겨져 있었다. 그 카데바는 후배들의 몫으로서 약물처리 중이었다. 우리 것도 그런 과정을 거쳐 왔으리라. 우리 조에 배정된 카데바는 자그마한 남자였다. 중년으로 보이는 그는 뭉뚝한 두 손끝에 박힌 굳은살로 미루어 막노동자였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시립병원에서 사망한 행려환자나 연고자 없는 변사체들이 의과대학으로 제공되던 시절이었다. 그의 험한 외모에서 삶이 순탄치 않았으리란 걸 막연히 추측하게 했다. 그런데 이렇게 사망 후에도 해부를 당하는 예사롭지 않은 일을 겪어야 하다니….

지금도 해부학시간을 떠올리면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데는 카데바의 모습보다 그 냄새의 기억이 더 크게 작용할 것 같다. 포르말린에 고정된 시신은 야릇한 향취를 풍겼다. 백리 밖에서도 분간 할 수 있을 만큼 독특하고도 고약한 냄새였다. 아무리 두텁게 고무장갑을 끼어 봐도 그 특유의 묘한 냄새가 양손에 배었다. 왕을 칼로 찌르고 왕위를 찬탈한 맥베스의 부인이 손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고자 몽유병 가운데 손 씻는 시늉을 하듯이 해부학 실습후의 우리들은 강박적으로 손을 씻곤 했다. 손뿐 아니라 전신에 해괴한 냄새가 파고들어 하교 길 버스에 올라타면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 일제히 나를 돌아보는 승객들의 시선을 피해야 했다.

하지만 이 카데바의 도움으로 우리는 숱한 근육과, 뼈와, 신경과 혈관의 이름을 숙지하였고 복잡한 라틴어 명칭들을 외우면서 인체에 다가갈 수 있었다.

소설 동의보감 중에는 허준의 스승 유의태가 제자를 위해 위암에 걸린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또 김홍신의 대발해에도 900년경의 발해국에서 3대째 대를 물린 의사가족이 등장한다. 그 중 아들에게 자신의 몸을 열어보라는 명의의 유언이 인상에 남는다.

누구나 몸을 아끼고 귀하게 여기기 마련이거늘 죽음 후에 신체를 훼손하도록 허락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있어 의학은 면면히 발달되어 온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 의과대학이 날로 증설되는 반면 카데바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기사를 보고는 나도 지난겨울 `장기 및 시신 기증 신청서'에 서명을 해서 증명서 하나를 받아두었다.

의사신문 창간 51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김애양<강남 은혜산부인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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