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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업가, 항일투사 - 주현측
사회사업가, 항일투사 - 주현측
  • 의사신문
  • 승인 2011.04.07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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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임시정부 등서 활동한 의사 독립운동가

주현측(朱賢則)
주현측(朱賢則)은 주백영과 관기 이경문의 장남으로 1883년에 출생하였으며 원적은 평안북도 선천군이다. 주현측은 1900년 선천 미동병원에서 일하다가 상경했으며 1905년 제중원의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졸업 직전 김필순 등과 함께 쓰러져가는 조국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1907년 4월 창립된 신민회에 가입하여 평안북도 지회에서 활동하였다. 주현측은 졸업 후 의술개업인허장 6번을 받았으며 학교에 남지 않고 선천에서 인제의원을 개원하였다.

그는 개업을 하면서도 비밀리에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다가 1911년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선천에서 체포되었다. 징역 6년을 선고 받았으나 이듬해 2심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2년 동안 옥고를 치렀을 뿐 아니라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국내에서 항일운동이 힘들어지자 주현측은 1912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에 진력하였으며 임시정부 평안북도 연통제 참사에 임명되었고 재무부참사도 역임하였다. 1912년에 그는 당시 상해에 와 있던 세브란스 후배 신현창과 함께 삼일의원을 개원하는 동시에 정치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상의원이 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주현측은 대한청년독립단과 상해거류민단 및 상해국가대표 기성회에 가입하여 안창호, 여운형 등과 함께 임시정부개편과 국민대표회의를 추진하였으며 홍사단에 가입하여 1926년까지 상해에서 활동하였다.

주현측은 1927년에 귀국하여 고향 선천에 동제의원을 개원하였고 사재를 털어 대동고아원을 창설하였는데 당시 평안북도에서 유일한 고아원이었다. 1930년에는 병원을 신축하고 고아원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는 농촌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외견 상 주현측은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으나 1936년 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37년 징역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 받았고 공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결과적으로 2년6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1942년에는 선교사를 통하여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낸 사실이 탄로되어 검거되어 선천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주현측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불같은 생애를 살았으나 조국의 해방을 보지못한 채 1942년에 60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주현측의 애국운동을 인정하고 1972년에 독립유공자로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주현측의 아들 주정균 역시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학교실에 몸담았으며, 손자 주종필도 기생충학을 전공하여 경희대학교 의동물학교실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잇고 있다.

(※ “주현측”으로 표기하여 왔음을 손자 주종필 교수가 알려왔다.)

집필 : 황의호(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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