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의 획득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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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신문
  • 승인 2011.04.07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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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 `엔진'의 역사와 계보

요즘의 페라리는 완전 자동화된 메가 팩토리에서 제조되지만 예전에는 미캐닉이 엔진을 한 개씩 만들었다고 한다. 페라리는 초창기부터 V12 엔진을 만든 회사였다. 1930년대와 40년대에 이미 V12엔진으로 경주에 나갔고 성적이 좋았다. 성적이 좋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페라리는 없을 것이다.

컴퓨터도 없던 시절에 아주 영리한 몇 명의 엔지니어들은 종이와 연필로만 V12엔진을 설계할 수 있었다. 박물관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초기의 콜롬보형식이라는 1.5리터 엔진이 V12였다. 1940년대였다. 이 엔진은 배기량을 키워 1990년대의 페라리 테스타로사 512까지 사용됐으니 50년을 버틴 셈이다.

V12는 V형으로 배치된 12개의 피스톤과 실린더를 갖는 엔진이다. 일반적인 차량들을 V12처럼 복잡한 엔진을 달고 다니지도 않는다. 웬만큼 좋다고 해야 V6이고 대 배기량이라고 해야 V8정도다.

요즘에도 V12는 란보르기니나 다른 슈퍼카의 상징처럼 되어있다. 엔진의 회전은 아주 부드러울 것으로 예상된다. 만들기는 그다지 쉽지 않다. 축이 길어지면 크랭크와 블록 그리고 피스톤의 모든 동작이 강성을 유지하며 기계적 진동을 만들지 않도록 뛰어난 설계와 제작 기술이 필요하다. 설계는 머리로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만드는 일도 쉽지 않다. 요즘에야 엔진을 CNC공작기계로 가공하지만 예전에는 손으로 계측하고 가공하는 수 밖에 없다. 대단한 손재주가 요구된다.

필자의 머릿속에는 초창기에 공장에서 밀링이나 보링 작업 및 검사를 했을 미캐닉들이 떠오른다. 엔진 블록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지만 당시에는 측정을 해가며 가공을 하고 회전하는 라우터 대신 줄칼이나 샌드페이퍼로 엔진을 다듬었을 것이다. 복잡한 형상의 가공에는 수 십년 기름밥을 먹었을 장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프로페셔널의 극치지만 취미활동처럼 보이는 진지한 공작처럼 보일 것은 틀림없다.

V12 엔진이 페라리의 고유한 품목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V12가 아니라 I8엔진만을 갖고 있었다. 그나마 피아트의 엔진을 변형한 엔진이었다. 개인적으로 엔초 페라리는 알파로메오나 아우토유니온 듀센버그 같은 차들에 달려있는 V12를 무척 부러워했다. 그래서 알파로메오에 있던 콜롬보(Gioacchino Colombo)를 영입했다. 콜롬보는 페라리의 가내수공업규모의 공장에서 작은 배기량의 1.5L V12엔진을 만든다. 이때부터 페라리의 엔진계보가 시작되었다. 집에서 직접 만든 이 엔진은 6800RPM에서 118 마력의 출력을 냈고 125라는 차에 탑재되어 레이싱에서 활약했다. 페라리는 1947년부터 1951년까지 여러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었다. 물론 F1에서도 우승했다. 엔진의 출력은 몇 번의 개량을 거쳐 280마력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알파로메오와 마세라티의 차들에 대항하기가 어려워지자 페라리는 콜롬보의 엔진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해 람프레디(Aurelio Lampredi)의 엔진을 채용했다. 람프레디는 슈퍼차저가 아닌 대배기량의 자연 흡기 엔진을 선호했고 F1에서 콜롬보의 엔진보다 좋은 성능을 낼 수 있었다.

1950년대 초반에 페라리는 람프레디 엔진으로 F1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페라리의 로드카들은 이 당시 람프레디의 엔진이 아니라 콜롬보의 엔진이 주력이었다. 람프레디가 중용되면서 최초의 설계자인 콜롬보는 1950년 회사를 떠나 다시 알파로메오로 돌아가서 레이싱카를 설계했고 몇 번의 우승을 했다. 그 다음에는 마세라티로 돌아가 250F라는 차를 설계했다. 250F는 레이싱의 역사에서 중요한 차종이다. 46회의 우승 기록이 있다.

람프레디의 엔진들은 1950년대를 풍미했다. i4나 i6엔진도 만들었고 V12도 만들었다. 그러나 1955년 페라리가 마세라티의 레이싱 팀을 인수하면서 알파로메오 출신의 유명한 기술자였던 비토리오자노(Vittorio Jano)를 영입하자 람프레디는 페라리와 결별했다. 자노의 V6 와 V8엔진들은 람프레디의 엔진들을 빠르게 대체했다.

페라리를 떠난 람프레디는 피아트에 들어갔고 피아트의 twin cam과 SOHC엔진을 설계한다. 이 엔진은 32년동안 피아트의 주력엔진이 됐다. 당시 피아트의 생산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피아트 124나 다른 차종들에 람프레디의 엔진이 얹혔다(요즘 토요타의 캠리나 코롤라의 생산기록은 피아트 124의 과거 기록과 경쟁하는 수준이다). 엔진은 고장도 잘 나지 않았고 성능도 당시 최고 수준이었다.

란치아가 페라리에 인수되면서 같이 영입된 비토리오자노는 람프레디와 콜롬보의 멘토였다. 원래부터 유명한 엔지니어였다. 란치아의 프로젝트로부터 들어온 V6/V8 엔진은 페라리의 심장이 되었다. 2002년 페라리/마세라티 엔진이 새로 개발될 때까지 이 엔진이 페라리 로드카의 심장이었다. 페라리 디노를 만들면서 개발된 이 엔진은 50년 동안 만들어진 셈이다. 디노의 V12버전은 1990년대가 되어서야 나타나 10년 정도를 지속한다(비토리오자노가 1960년대에 사망하지 않았다면 더 새로운 엔진이 나왔을 것 같기도 하다). 디노타입의 마지막 버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페라리 360에 들어갔다. 2004년 단종된 가장 성공적인 차종이니 50년 정도를 버틴 셈이다. 2002년이 되면 페라리/마세라티 공동 개발의 특별한 엔진이 나타나 이들 모두를 대체한다.

1950년에서 1960년 동안 최고의 스포츠카에서 성능 부족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엔진은 몇 명의 빼어난 엔지니어들이 만든 것이고 그 배경에는 F1과 로드레이싱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엔진을 집에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저변의 배경이 있었다. 항공기나 배의 엔진 부품을 만들어내는 설계와 제작의 경험이 필요했고 전쟁은 그 바탕이었다.

이태리차들의 엔진 계보는 페라리의 개발자들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고 이들이 피아트나 알파로메오, 란치아 같은 회사들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만들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럽의 다른 회사들에게 피아트가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안윤호〈송파 대광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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