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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마음으로 걸은 이화동 골목길
고마운 마음으로 걸은 이화동 골목길
  • 의사신문
  • 승인 2011.01.1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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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와 마로니에 공원은 젊은 사람들의 거리입니다. 늘 버스럭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지요. 아마 한 밤중에도 어느 소극장에서는 연극을 끝낸 후 둘러 앉아 눈을 반짝이며 내일을 이야기 하는 젊은 배우들의 열기를 문틈으로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열정이 숨어 있는 거리를 뒤로하고 언덕길을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거기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길가 찻집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간판을 세워 두었을 뿐이고, 수공예품을 파는 가게엔 아예 간판조차 없습니다. 구부러진 언덕길 가장자리의 전봇대엔 앙증맞은 달팽이가 그려진 동그란 표지판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조금 자세히 보면 `천천히'라는 글씨가 보입니다.

이런 작은 것에 이끌려 걷다보면 걸음걸이가 점점 느려집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예쁘고 그리고 따뜻해 바삐 지나갈 수 없습니다. 석축 위의 시멘트 담벼락엔 온통 꽃이 가득 피어 있습니다. 오른쪽 길가 담벼락이라고 하기엔 너무 낮은 그곳엔 알록달록한 타일이 붙어 있고 타일마다 젊은 남녀들이 쓴 사랑의 글귀들이 가득합니다.

몇 걸음 더 올라가면 왼쪽 허름한 철제 대문이 있고 그 앞에 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담벼락에 커다란 벽시계가 걸려 있습니다. 시계는 움직입니다. 이제 겨울이 시작되었는데 대문 입구에 심어놓은 매화나무는 이미 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차가 다니는 길 가 대문도 없이 그저 출입문 만 달랑 있는 허름한 집 벽은 온통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고 거기 편안하게 보이는 의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창문엔 나무 조각과 몇 가지 소품을 덧대 언제라도 동화속의 공주가 문을 열고 인사를 할 듯합니다. 아! 그 선명한 파란색의 커다란 나팔꽃은 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요.

길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깨진 기와를 덮은 천막조각들이 어지럽고 지난 가을까지 무성했던 풀들이 말라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나무엔 농익어 떨어지려는 감이 아직 꽤 많이 남아 초겨울의 정취를 더합니다. 두어 마리의 새가 감을 쪼고 있을 뿐 이 허물어져가는 동네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렇게 무심결에 시간을 보고 걸음을 옮기다 보니 이 동네가 문득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골목안 가파른 언덕길 계단엔 초원이 그려져 있고 그 위를 새들이 날고 있습니다. 골목 어귀에 붙은 작은 전단지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월세 방 있음. 보증금 100만원 월 22만원. 그러고 보니 초원이 그려진 계단 여기 저기 시멘트 조각이 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커다란 시계가 걸려 있던 낡은 판자벽, 동화 속 공주가 사는 듯 예쁘게 꾸며진 길가 작은 집 출입문의 깨진 유리에 붙여진 테이프 그리고 새에게 통째로 남겨진 감나무를 보며 가슴이 점점 따뜻해집니다. 이곳에 오길 잘했습니다.

멀리 인왕산이 보입니다. 여기 어딘가 이승만 대통령이 살았던 이화장이 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부러워해야 할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동네, 이화동입니다.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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