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와 마로니에 공원은 젊은 사람들의 거리입니다. 늘 버스럭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지요. 아마 한 밤중에도 어느 소극장에서는 연극을 끝낸 후 둘러 앉아 눈을 반짝이며 내일을 이야기 하는 젊은 배우들의 열기를 문틈으로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열정이 숨어 있는 거리를 뒤로하고 언덕길을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거기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길가 찻집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간판을 세워 두었을 뿐이고, 수공예품을 파는 가게엔 아예 간판조차 없습니다. 구부러진 언덕길 가장자리의 전봇대엔 앙증맞은 달팽이가 그려진 동그란 표지판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조금 자세히 보면 `천천히'라는 글씨가 보입니다.
이런 작은 것에 이끌려 걷다보면 걸음걸이가 점점 느려집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예쁘고 그리고 따뜻해 바삐 지나갈 수 없습니다. 석축 위의 시멘트 담벼락엔 온통 꽃이 가득 피어 있습니다. 오른쪽 길가 담벼락이라고 하기엔 너무 낮은 그곳엔 알록달록한 타일이 붙어 있고 타일마다 젊은 남녀들이 쓴 사랑의 글귀들이 가득합니다.
몇 걸음 더 올라가면 왼쪽 허름한 철제 대문이 있고 그 앞에 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담벼락에 커다란 벽시계가 걸려 있습니다. 시계는 움직입니다. 이제 겨울이 시작되었는데 대문 입구에 심어놓은 매화나무는 이미 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길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깨진 기와를 덮은 천막조각들이 어지럽고 지난 가을까지 무성했던 풀들이 말라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나무엔 농익어 떨어지려는 감이 아직 꽤 많이 남아 초겨울의 정취를 더합니다. 두어 마리의 새가 감을 쪼고 있을 뿐 이 허물어져가는 동네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렇게 무심결에 시간을 보고 걸음을 옮기다 보니 이 동네가 문득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골목안 가파른 언덕길 계단엔 초원이 그려져 있고 그 위를 새들이 날고 있습니다. 골목 어귀에 붙은 작은 전단지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월세 방 있음. 보증금 100만원 월 22만원. 그러고 보니 초원이 그려진 계단 여기 저기 시멘트 조각이 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커다란 시계가 걸려 있던 낡은 판자벽, 동화 속 공주가 사는 듯 예쁘게 꾸며진 길가 작은 집 출입문의 깨진 유리에 붙여진 테이프 그리고 새에게 통째로 남겨진 감나무를 보며 가슴이 점점 따뜻해집니다. 이곳에 오길 잘했습니다.
멀리 인왕산이 보입니다. 여기 어딘가 이승만 대통령이 살았던 이화장이 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부러워해야 할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동네, 이화동입니다.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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