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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지바고 <96>
의사 지바고 <96>
  • 의사신문
  • 승인 2008.12.1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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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의사 지바고'를 극장에서 본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서정의 아름다움은 감성이 강한 사춘기의 나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자연에 대한 동경은 나에게 열병을 앓게 하였으며 그 강호(江湖)에 대한 병은 아직도 남아 있다.

특히 지바고가 `바리키노'에 돌아와 아내와 둘이서 감자를 캐는 장면과 시를 쓰는 장면은, 나에게 의사와 농부와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고 그 후 몇 년을 산 속이나 강가에서 보낸 시간들이 많았다. `가나안 농군학교'도 여러 번 답사하였고 영국의 낭만파시인인 `키츠', `워즈워드', `바이런'과 `신석정', `김영랑'시인처럼 자연을 노래한 시들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 후 40년의 세월이 빠르게 지나갔다. 긴 방황 끝에 의과대학에 입학, 그리고 졸업, 결혼,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숨가쁜 현실 속에 남편과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며 하루하루를 지내다보니 자연에 대한 동경과 열병은 나의 무의식 속에 조용히 잠들어 있다가 가끔씩 꿈틀대고 있을 뿐이다.

깊은 산속을 걷거나 아름다운 호숫가에 앉아 있으면 문득 문득 고등학교 때의 감정이 스쳐 지나가지만 병원에 출근하며 일상으로 돌아오면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에 눌려 감정은 정지되고 응고되고 만다.

최근에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이제는 서정의 아름다움을 고등학교 때처럼 느끼지 못한다. 나이 들어 다시 본 영화는 나의 감정이 메말랐는지 사춘기 때처럼 자연에 대한 열병은 없다. 반면에 한 개인의 삶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의사 `지바고'는 볼세비키 혁명을 맞이해서도 자신의 영적 독립성을 지켜나가며 진리를 탐구하는 고독한 사람으로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1917년 혁명은 그의 운명에 심각한 변화를 가져오고 자기의지와 상관없이 혼란과 경제적 궁핍과 사유재산의 몰수, 체포와 이별, 병들고 죽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어떤 운명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끌려 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큰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 의지가 무시되고 꿈이 상실되는 현실의 고뇌가 느껴진다.

지난 40년을 돌아보면 커다란 거역하지 못할 삶의 굴레가 지금까지 나를 끌고 온 느낌이다. 내가 선택한 것보다 선택되어진 것들이 더 많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태어남, 부모님, 늙어감, 죽음과 시대, 계절의 흐름 등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고 뿌릴 수도 없는 것이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나 지금과 같은 경제적 어려움 등 주위의 사건 사건들이 나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벌어지고 그것이 나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며 나는 무력함에 잠잠해진다.

`의사 지바고'를 나의 인생의 종점에서 다시 보게 되면 또 무엇이 느껴질까? 자연에 대한 그리움일까? 운명에 대한 무력함일까? 아니면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죽음과 죽음 뒤의 한 인간의 영향력일까? 아마도 운명을 응시하며 삶의 마지막 불꽃을 태워야한다는 나만의 영감을 얻을 지도 모르겠다.

지나온 시간보다 훨씬 적은 시간이 나에게 남아 있다. 남은 시간은 내 무의식속에 울음을 참고 있는 슬픈 염원들을 위로해 주고 해방시켜 주는 시간으로 채워주고 싶다. 내안에 울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듣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눈을 감는다.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는 고요한 밤이다. 가로등 불빛 속에 내리는 눈은 바람 따라 이리 저리 흩날린다. `의사 지바고'에 나오는 설경이 영상으로 지나간다.

오늘 밤은 바리키노에서 감자를 캐는 `지바고'를 만나는 꿈을 꿀 것 같다. 깊은 산속 호숫가 초가집, 난로 옆에서 시를 쓰며 행복에 겨워 미소를 짓는 나를 만날 것도 같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도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슬픈 나를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이주성<인천 이주성비뇨기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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