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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창궐하는 베르테르 바이러스
우리 사회에 창궐하는 베르테르 바이러스
  • 의사신문
  • 승인 2008.11.10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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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소자<서대문 나산부인과의원장>

▲ 남소자 원장
18세기 중엽 유럽에는 베르테르 홍역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신기루 속의 이상향을 찾아 현실을 떠났다.

젊은 베르테르와 로테와의 사랑, 그것은 삶에 지친 당시 젊은이들에게 행복한 꿈과 같은 낭만을 심어 주었으며 권총자살이라는 비극적인 최후에 열광했다. 그때 전 유럽에는 베르테르가 입었던 망토나 자살도구인 권총이 맑은 하늘에 먹구름같이 유행했고 모방 자살이 사막의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 자살바이러스는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인간에게는 감기처럼 흔하게 감염됐다.

감기로 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감기도 오래 방치하면 면역력을 빼앗고 결국 폐렴이나 중증의 합병증을 몰고 오는 저승사자 구실을 한다. 감기바이러스가 갖고 오는 정신적 바이러스는 바로 우울증이다.

세상살이에 아무것도 안 된다는 패배의식에 분노가 끓고 속에서 끓는 분노는 타인을 향해 분출하지 못해 자신을 징벌함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다는 망상을 품게 된다. 그러나 개인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파급되는 정신적 바이러스질환은 사회 병리현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는지 모른다.

1935년 8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한 카페에서 흘러나온 Gloomy Sunday란 음악은 작곡자를 그 자리서 자살하게 만들고 그날 이후 며칠 새 187명의 자살자를 양산해냈다. 작곡자는 우울한 심정을 달래지 못해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는지는 모르나 그 작곡자가 죽고 난 뒤 수천 명의 자살자들 모두가 우울증환자였다는 증거는 없다.

최근 우리나라 연예계의 스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회가 시끄럽다. 저명한 정신과 의사나 사회병리학자들이 자살예방을 위해 갖가지 처방을 내놓고 있으나 일개 산부인과의사인 내가 그런 예방책을 내놓을 자격도 없고 진단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유명인, 특히 젊은이가 자살한 사건이 연이어 보도되고 남은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해 관심을 안 둘 수 없고 또 자살자의 비율이 OECD 중 2배나 높다는 데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순박한 우리 국민들을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만들었는가. 자살은 마음의 병이 아니라 신체의 병이라고들 한다. 뇌의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나 세로토닌 등의 기능이 약화되고 한 가지 상념에만 파묻히게 해 개인의 선택권이 없어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저질러진다고 한다.

민족적으로 헝가리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마자르인들의 자살률이 높다는 소리는 듣고 있었으나 그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백의민족의 자살이 갑자기 늘어났다는 것은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일본은 숨쉬기조차 어려운 정치체제 속에서 배를 가르고 자결하는 것이 국민적 추앙을 받은 때도 있었고 1960년대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시마 유게오 같은 소설가가 배를 갈라 자살한 사회다.

개인의 자기징벌은 우울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우울증으로 치료를 요하는 사람은 전 인구의 7.5%, 375만명쯤 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혼이나 배우자 죽음 등 생활환경변화가 주된 원인이고 여자는 10∼15%, 남자의 5∼12%보다 두 배쯤 된다.

이것은 복잡한 여체의 신비 때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갱년기나 폐경기 때 여성호르몬 분비가 급격히 떨어져 뇌신경전달물질을 교란시키기 때문이다. 그만큼 여성들은 체내 내분비대사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폐경 때쯤 된 여자가 밤새도록 우는 경우도 있고 가장 축복 받아야할 산후에도 우울증이 생긴다. 이럴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신과에 가보라면 질색을 한다.

미친 사람 취급한다고 원망도 하고 의사 말을 듣고 정신과에 가서도 항우울제 약효가 나타나는 2∼3개월쯤 후 다 나았다고 약을 끊어버려 상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특히 인기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의 경우 세상 사람들의 주시를 받아 행동에 아주 조심을 해도 갖가지 루머에 시달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만든다.

쓸데 없는 가십거리를 만들고 유포하는 자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와 다름 아니다. 죽음이 아름다운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캄캄한 적멸의 궁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지만 남은 사람의 고통은 평생 간다.

현대의학은 우울증쯤은 쉽게 치료한다. 그리고 “이것이 인생이냐? 그렇다면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는 것이 삶이 아니다. 들불처럼 번지는 자살충동, 이것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의학과 자신의 품성뿐이다. 제발 사회가 미치더라도 개인은 미치지 말자. 70∼80세의 시한부 인생은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다. 

남소자<서대문 나산부인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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