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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 밤의 추억 <82>
한 여름 밤의 추억 <82>
  • 의사신문
  • 승인 2008.08.2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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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을 지나니 설국이었다' 이 구절은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첫머리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글은 내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데 긴 터널을 지루하게 뚫고 달려온 기차의 차창 앞에 불쑥 나타난 눈 덮인 마을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터널을 지나면 설국. 그 환상적인 풍경은 지금도 여전히 나를 황홀하게 만들고 있다.

며칠 전 나는 가족과 함께 북해도 후라노 근처의 산골마을에 왔다. 일본에 거주하는 친구의 도움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터널을 지나니 설국이 아니라 천국이라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평소 내가 동경하던 곳이 나왔다. 덥고 짜증나는 여름, 꽉 막힌 진료실에서 지루하게 보냈었는데 이곳은 평소 상상의 날개를 펴며 동경했던 장면과 흡사했다. 시골역은 조그마한 간이역으로 옛날 우리나라의 시골역을 연상케 했다.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촌로들의 모습이나 낡은 긴 의자 역시 진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역에서 나오니 필자가 어릴 때 살던 고향의 모습들-작은 산이 있고 산 사이로 논과 밭이 있으며 집 앞에 큰 정자나무가 있는-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깊은 밤 하늘을 쳐다보면 쏟아질 듯 별이 가득했고 논가에서 우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잊었던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이국적인 것들을 보기 위해 그곳에 갔지만 잃어버린 고향을 만난 것처럼 낯익은 모습들이 여기 저기서 나타났다. 나는 딸들과 정자나무 밑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눈이 시리도록 별을 바라봤다. 서울의 후텁지근한 바람이 아니라 조금은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별 하나, 하나에 잃어버렸던 전설이 내 가슴에 알알이 박혀 나는 어느새 먼 과거로 돌아갔다.

나의 고향은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 호계리다. 지금은 안양시 호계동으로 바뀌고 앞마당에 정자나무와 우물, 옆에 있던 딸기밭과 포도나무는 없어졌다. 그 자리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서울로 이사했지만 그때의 고향 모습은 후라노의 모습과 비슷했다. 낮에는 동네 아이들과 안양천에서 멱을 감다 저녁이 되면 어슬렁어슬렁 집으로 돌아갔다. 동네 어른들은 정자나무 아래 멍석을 깔고 메케한 모닥불 냄새를 맡으며 달빛과 별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함지박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란 강냉이가 먹음직스럽게 담겨 있고 우물에는 밭에서 딴 개구리참외와 수박이 담겨 있었다. 또 모닥불 밑에는 감자와 고구마가 익어가고 모닥불 위로는 콩깍지가 타는 냄새가 나고 있는 것이다.

옆집 할아버지가 호랑이를 만난 이야기며, 뒷집 할머니의 3·1 운동 얘기며 멍석에 누운 모든 사람들은 별처럼 먼 얘기를 들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모닥불은 차츰 시들어가고 마을의 여름밤은 깊어졌다. 어머니는 나를 가슴에 안고 자장가를 불러 주셨고 나는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옛날 고향집 마당에 포도나무가 있었듯이 후라노에도 집집마다 포도나무가 있어 한참 영글어가고 있었다.

내 고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 빛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 곱게 밀려서 오면/…'

내일이 되면 며칠 간의 휴가를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가 분주한 삶을 살아가겠지만 우리 마음에 하늘 빛 푸른 바다가 살아있고 흰 돛단배가 밀려오면 우리의 인생은 성숙해지고 잘 익은 청포도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열매 맺는 인생이 될 것이다.

이주성<인천 이주성비뇨기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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