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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No 1 in D Op6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No 1 in D Op6
  • 의사신문
  • 승인 2008.05.15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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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한계를 넘어선 화려함의 극치


이태리 제노바에서 태어난 19세기 최대의 바이올린 주자 파가니니는 매부리코와 호리호리한 몸매, 휘날리는 머리칼, 검은 연미복에 뾰족한 구두 등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사생활이나 연주활동이 사실보다 크게 과장되거나 고의로 은폐되어 전하여졌기 때문에 신비에 싸인 음악가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 자라나 아버지로부터 5세 때 처음 만돌린을 선물받은 후 7세부터는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에 대해 초보적인 지식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후 프란체스코 네로, 산로렌초 성당의 악장 자코모 코스타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순식간에 일취월장했다. 1793년 11세에 첫 공개연주회를 갖고 크게 성공을 거두자 당시 바이올린의 거장인 롤라가 있는 파르마로 옮겨 가게 된다.

1801년부터는 어느 귀부인과 동거를 하면서 바이올린을 접어두고 기타에 몰두하여 공식 연주회에서 아예 자취를 감춘다. 4년 후 홀연히 다시 나타난 그는 바이올린 연주를 다시 개시하면서 나폴레옹의 누이동생인 바키오키의 초대로 그곳 궁정의 지휘자로 3년간 봉직을 하게 된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주법은 그 흐름을 직접 잇는 유파가 없기 때문에 그 자신세대로 소멸되고 만다. 그가 주로 사용한 주법은 왼손의 피치카토와 레가토의 극단적인 분리 등 종전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가 후세의 바이올린 음악에 미친 영향은 극히 크다고 할 수 있으며 그 명인적 연주효과의 강렬한 표현성이 낭만주의 음악에 미친 영향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파가니니가 몇 곡의 바이올린협주곡을 작곡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0곡은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공식적으로 6곡 밖에 되지 않는다. 파가니니는 작곡가로서보다는 연주가로서 기교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곡을 하였다. 그는 이들 협주곡을 통해 극한에 이르는 바이올린 연주기교를 추구하였기 때문에 음악사상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제 1악장은 알레그로 마에스토소의 소나타형식으로 연주가 20분 이상 되지만 화려하고 변화가 풍부하여 지루하지가 않은 악장이다. 제 1주제를 관현악으로 힘차게 시작하고 2주제는 독주 바이올린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하기 시작하며 비애적인 오페라의 레치타티보를 연상시키는 경과부가 나타난다. 이후 행진곡풍의 반주에 사랑스런 독주의 멜로디가 흐른 뒤 코다에 들어가는데 웅대한 규모를 가지면서 극적이고 화려하게 막을 내린다.

제 2악장은 아다지오 에스프레시보로 서정미가 넘치는 악장으로 슈베르트는 `마치 천사의 노래를 듣는 듯하다'고 표현하였다. 독주 바이올린은 아리오소와 같은 정열적인 부드러움을 노래하게 되면서 다시 관현악의 강렬한 화음으로 나타나 제 3악장으로 연결되게 된다.

제 3악장은 알레그로 스피리토소 론도형식으로 독주 바이올린의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주제로 시작되어 파가니니 특유의 스타카토 주법으로 듣는 이를 매혹하게 된다. 이후 여러 가지 복잡하고 화려한 바이올린의 기교를 표현하면서 차차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면서 마지막에는 관현악이 곁들여 화려하고 장대한 막을 내리게 된다.

■들을만한 음반: 지노 프란체스카티 (Vn), 유진 올만디(지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CBS, 1971); 살바토레 아카르도(V), 샤를 뒤트와(지휘), 런던필 (DG, 1974); 아르트르 그뤼미오(Vn), 피에로 벨루치(지휘)
 

 오재원〈한양대 구리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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