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학생 여의사 1호 허영숙
안명옥의 ‘역사를 만든 여의사들’(10)
허영숙(1897.10.6.-1975.9.7.)은 1897년 서울에서 사업가 허종의 막내인 넷째딸로 태어났다. 어머니 나이가 46세인 늦둥이였다. 허영숙이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어머니가 네 딸을 키웠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허영숙은 1906년 진명여학교 보통학교에 입학해 중등과를 거쳐 1911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 뒤 3회로 졸업했다. 1914년 졸업 후, 허영숙은 의사가 되려고 일본 유학을 떠났다.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최초의 조선유학생
허영숙은 17세 되는 1914년 동경 요시오카(吉岡)여자의학전문학교(현 동경여자의과대학)에 조선여성 최초로 입학해 1918년(21세) 7월에 졸업했다. 요시오카여자의학교는 1900년 개교 이후 1912년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됐지만, 허영숙이 입학할 당시에는 졸업 후 총독부에서 실시하는 의사시험에 합격해야 의사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1920년 졸업생부터는 졸업과 동시에 의사면허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허영숙은 동경여의전 재학 시절인 1917년, 춘원 이광수(1892.3.4.~1950.10.25.)를 만나 그의 건강을 돌보다가 우여곡절 끝에 1921년 결혼했다. 허영숙이 한국근대문학의 거목인 춘원 이광수의 부인으로 더 알려지는 바람에 본인의 능력과 한국사회에서 여성선구자로서의 역할이 오히려 드러나지 않은 측면이 있다.
1918년 7월, 동경여의전 졸업 후 귀국을 앞둔 허영숙에게 이광수가 정식으로 청혼하지만 허영숙은 거절했다. 그러나 귀국 후에도 이광수의 끈질긴 구애와 설득은 계속됐고, 이광수는 9월에 부인인 백혜선과 이혼했다.
신동원의 연구에 의하면 귀국한 허영숙은 1918년 10월2일 총독부의원에서 실시한 의사시험을 봤다고 전해진다. 허영숙은 모친의 여전한 반대와 다른 사람과의 억지 혼인 압박 등으로 10월 중순 이광수와 중국 베이징으로 도피여행을 떠났다. 베이징에서 1차세계대전의 종전소식을 접한 이광수는 11월에 귀국하고 다시 12월 동경으로 가서 3·1 독립운동의 단초가 되는 그 유명한 ‘2·8 독립선언서’ 준비 작업을 하게 된다.
최초의 개업 여의사 : 영혜의원
베이징에서 귀국한 허영숙은 조선총독부의원에서 주로 산부인과와 소아과를 전문으로 하는 임상 수련을 1년간 했고, 함경남도 함흥의 병원에서도 일정 기간 실습했다고 한다. 의사면허는 1919년 취득했으며, 1919년 11월28일자 ‘총독부관보’ 제2190호 13면에 허영숙의 면허취득일이 10월10일, 면허번호는 348호로 나와 있다.
1920년 5월1일, 허영숙은 모친과 함께 살고 있던 서울 서대문정 1정목 9번지, 즉 서대문 1가 9번지 자택을 개조해 영혜의원을 개원했다. 여성과 아동들을 위해 △산부인과 △소아과 △내과 진료를 했는데, 우리나라 최초로 여의사가 개업한 의원이었다. 병원 이름인 ‘영혜의원’의 ‘영’은 ‘허영숙’의 ‘영’을 뜻하는 것이고, ‘혜’는 ‘광혜원’이나 ‘혜민서’에 들어간 의술을 베푸는(시혜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한편, 이광수는 동경에서 ‘2·8 독립선언’ 직후, 곧바로 상해로 탈출해 임시정부에 몸담아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필이 됐다. 그는 허영숙에게 상해에서 살자고 요청했지만, 개원까지 한 허영숙은 이광수에게 빠르게 상해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할 것을 요구했다.
한동안의 의견차와 갈등을 거쳐, 허영숙은 이광수의 절절한 구애로 1921년 2월 상해로 갔다가 일주일 만에 귀국했다. 이어 이광수가 3월 말 도산 안창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국했고, 같은 해 5월 두 사람은 결혼했다. 4년여 동안 이광수와 허영숙 사이에 오간 편지가 1200여통이라 한다.
다양한 삶의 행보
허영숙은 1920년 4월1일 창간한 ‘동아일보’에 5월10일 신문논객으로도 데뷔했다. ‘화류병자의 혼인을 금할 일’이라는 주제여서 매서운 논란이 됐다고 한다.
개업한 지 3년여가 지난 후, 허영숙은 다시 동경제국대학으로 3년간의 유학을 결행했으나 4개월 만에 돌아왔다. 허영숙은 1924년 남편 건강이 악화되며 ‘동아일보’의 정식기자로 2년여 동안 기자 생활을 했다. 1925년말부터 1927년 3월까지는 학예부장을 맡기도 했다.
기자 허영숙은 전문분야를 살려 △의학상식 △육아 △가정 등에 관한 기사를 썼다. 그는 1925년 9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에 ‘어린아이 기르는 법’(41회), ‘조선여자의 천직’(3회) 등을 연재해 자녀 양육법과 여성의식계몽에 앞장서며 신여성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기자생활을 하던 중인 1926년 7월, 허영숙은 오래 기다리던 임신을 했다. 그는 이듬해인 1927년 3월 신문사를 떠나 5월30일 첫 아들 봉근을 출산했다. 허영숙의 자녀들은 2년 터울로, 2년 후 차남 ‘영근’, 4년 후 장녀 ‘정란’, 다시 2년 후 차녀 ‘정화’가 태어났다.
허영숙은 한동안 가정과 아이를 돌보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한 중에 허영숙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934년 2월18일 첫 아들이 친구와 놀다가 밀려 넘어져 쇠조각을 스친 상처가 패혈증으로 발전해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그 충격으로 허영숙은 1년 이상 방황했다.
그는 1935년 8월 심기일전해 삶의 의미를 갖는 전환을 하고자 37살에 3차 일본유학을 결행했다. 허영숙은 일본 적십자병원에서 일했고, 6세·2세·생후 6개월 된 세 아이와 유모를 동경으로 불러 함께 돌보며 자신도 열심히 공부했다. 본디 3년 계획으로 박사 과정을 끝내려 했으나, 동우회 사건으로 인한 이광수의 체포 소식을 듣고 1년 반 만인 1937년 6월에 귀국했다.
허영숙은 그 해 8월부터 산원을 건축했고, 1938년 5월31일 효자동에 해산전문병원 허영숙산원을 열었다. 최초의 민간 산원이었다. 병실 20여실을 온돌방으로 갖추고 어려운 사람에게는 실비로 진료를 했다고 전해진다.
허영숙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이광수는 출옥 후 친일활동을 시작했고 허영숙과 불화도 잦아졌다. 전처 아들의 문제와 두 사람의 가치관, 특히 경제관에 큰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 이광수가 반민특위에 회부되자 남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1946년 허영숙은 남편과 합의 이혼했다.
이광수는 한국전쟁 다음 달인 1950년 7월12일 여름 인민군에게 납북됐고 그 후로 생사를 알 길이 없었다. 실제로는 이광수는 납북 석달 후인 1950년 10월 사망했으나 가족이 그의 사망을 확인하게 된 것은 수십 년 후 일이다.
6.25 전쟁이 끝나고 허영숙은 남편의 전집을 출간할 생각으로 1956년 이광수의 ‘광’과 허영숙의 ‘영’을 합친 광영사라는 출판사를 허영숙 산원에 등록하고 전집 출판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춘원의 모든 소설과 글들을 모아 전집을 출판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1963년 ‘춘원선집’ 24권을 내긴 했지만 내용이 미진했다. 결국은 몇 년 후 조직이 갖춰져 있는 삼중당의 도움을 받아서 제대로 된 ‘이광수 전집’ 20권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삼중당에서의 전집 출간은 1960년대에 수년에 걸쳐 진행됐다.
허영숙은 여의사로서 의료계에서도 선구자로서 공이 컸고 기자로서도 사회에 미친 영향이 지대했으나, 춘원 이광수의 아내라는 자리로 인해 본인의 업적이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됐다는 점이 아쉽다. 허영숙은 20여년이나 생사를 알 길 없었던 남편 춘원 이광수의 기념비 건립을 위해 자녀들이 있는 미국에서 1975년 돌아와 기념사업을 추진하던 중 쓰러져, 1975년 9월7일 77세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