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여의사 안수경

안명옥의 ‘역사를 만든 여의사들’ (9)

2026-03-06     안명옥 前 차의과학대 교수(제17대 국회의원)

안수경(1896~?)과 김영흥, 김해지는 김점동(박에스더) 이후 1918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수료.졸업해 총독부 의사면허증을 취득한 최초 여성들이다. 위탁교육 시작 당시인 1914년에는 조선총독부의원부속의학강습소로 시작해 2016년부터 경성의학전문학교가 됐으므로 졸업당시는 경성의학전문학교다. 

로제타 홀에 의해 청강생으로 위탁교육이 성사돼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초기 여의사 연구들에는 이들 기록은 거의 누락돼 있다. 안수경, 김영흥, 김해지는 1918년 4월 졸업했고 당시 다른 남학생 졸업생들과 마찬가지로 자동적으로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이는 1918년 7월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허영숙보다 약 3개월 빠르다. 의사면허 취득도 다음해 10월 의사면허시험에 합격한 허영숙보다 5개월, 혹은 17개월 먼저다. 자세한 논란은 원저인 ‘역사를 만든 여의사들’ 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번호에서는 그간 묻혀 있던 3명 초기 여의사 중 비교적 기록이 많은 안수경의 삶을 살펴본다. 

안수경의 배경과 의학 입문

안수경은 경성에서 태어나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아버지 안왕거(본명 안택중)는 △법관 양성소 교관 △한성사범학교 교관 및 교장 △수학원 교관을 역임했고 동궁이었던 영친왕의 스승이기도 했다. 1911년부터 ‘신해음사’ 시집을 간행했는데 안수경 글도 여러 편 실렸다고 한다. 남동생 안광천(안효구)도 1919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의사다.

김영흥과 김해지는 로제타 홀 추천으로, 안수경은 경성여고보 교장 추천으로 1914년 입학했다. 수업료는 남학생들같이 면제받았고, 평양에서 온 김영흥과 김해지는 기숙사에서 지냈다. 다만 안수경은 집이 경성이므로 통학했다. 청강생으로 입학하되 성적이 보증된다면 남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졸업과 동시에 의사면허가 수여될 것이라는 점, 교실이나 다른 곳을 갈 때에는 늘 여성 샤프롱이 그들을 보호할 것이라고 1913년 광혜여원 보고서는 전한다. 

‘총독부관보’ 제1693호, 1918년 4월1일자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 47명 졸업자 명단에 △안수경 △김해지 △김영흥의 이름이 실려있다. 5월18일자 제1773호에는 의사면허 취득자 명단에 이름이 있다. 조선 국내 최초 여의사들 탄생이었다.

1918년(대정 7년) 4월 중 면허취득자로 △안수경(면허번호 244호) △김영흥(248호) △김해지(251호)가 기록돼 있다. 한편, 1919년(대정 8년) 11월28일자 ‘총독부관보’ 제2190호 13면에는 허영숙이 면허취득일 10월10일, 면허번호 348호로 적혀 있다. 즉, 지금까지 1918년으로 알려져 왔던 허영숙의 의사시험 합격 및 면허취득 연도가 실제로는 1919년이었으며 이 기회에 바로잡는다.

의사 안수경의 눈부신 활동

졸업 후 안수경과 김영흥은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일했고 김해지는 평양에서 근무했다. 안수경은 동대문부인병원 산부인과에 오래 근무하며 다양한 활동을 했고 1930년대에는 동대문부인병원장을 역임했다. 

그의 행적과 관련해 많은 기사들이 있는데, 정작 안수경은 역사에서 묻혀 있었음이 의아하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1921년 3월5일자 ‘동아일보’에 ‘신진여류(新進女流)의 기염(氣焰)(十二) 미신과 위생사상; 병자에게 약은 아니쓰고 푸닥거리만 함을 금하라’(여의, 안수경여사담(談))이 있다. 동대문부인병원장 시절인 1935년 4월9일자 ‘동아일보’에는 ‘한 직업 십오년에 보고 들은 세태인정; (下) 가정불화는 남자의 책임. 가정 원만의 비결은? 좀 더 절조 잇는 생활을 합시다(동대문부인병원장 안수경양)’도 있다.

이렇듯 의사 안수경의 활동은 눈부셨다. 1939년 1월1일자 ‘조선일보’에는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일한 안수경의 20년간의 꾸준한 헌신을 다룬 인터뷰 기사도 있다. ‘생명 영접 이만오천명’ 제목으로 미루어 산부인과 의사로서의 안수경의 활약을 짐작할 수 있다. 기사 전문은 원저에 실었다.

그동안 부각되지 않았던 사건도 있다. 1925년 미 감리교 경영당국이 재정긴축을 위해 동대문부인병원을 세브란스병원과 합병하기로 하자 이에 맞서 동대문부인병원의 독립적 운영을 지켜냈다. 부인병원 폐지는 ‘동대문부인병원 폐지 반대 연맹회’를 결성했는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조선여자청년회 △동대문의약간청년회(東大門醫藥看靑年會) △간호부회 △산파회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등 여섯 여성단체가 참가했다.

이들은 여러 의미로 조선의 큰 손실임을 강조하고 남자 측이 경영함은 시대착오라고 주장했다.이 중 안수경은 △유영준 △정자영 △윤보명 △현덕신과 함께 앞장서서 합병을 반대해 결국 관철했다. 

실로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다음날인 1925년 5월23일자 ‘동아일보’ 기사의 제목은 ‘책임자도 폐지반대, 문제는 당분간 보류될 모양, 동대문부인병원 존폐 문제’로 그 보류과정을 전하고 있다. 

안수경과 관련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대 신문매체 기록이 60건 이상이고, 그 외 ‘조선일보’ 기사만도 30여건이 넘는다. 2021년 이영아가 발표한 연구에 의하면 안수경은 1942년경 동대문부인병원을 퇴직하고 개업했다. ‘매일신보’ 1942년 7월24일자 기사는 관훈정 197-9번지에 ‘안산부인과’를 개업했다고 전한다. 그 후 1947년 결성된 서울보건부인회 창립 행사가 기록에 나오는 마지막이라고 한다.

조선여성건강증진에 있어 그의 역할은 지대했다. 동대문부인병원 근무기간이 24년, 적어도 30여년 이상을 조선 여성들의 임신과 출산, 신생아 건강돌봄까지 도맡을 정도로 헌신했으며 초기 여의사들 중 현장에서 가장 환자를 많이 돌본 여의사였다. 

이영아는 지적하기를, 1924년에 발간된 경성의학전문학교일람에는 이들 세 명 명단이 누락돼 있고 총 졸업생도 ‘총독부관보’의 47인과 달리 44인으로 기재돼 있다고 한다. 총독부에서 공식적으로 ‘졸업자’로 인정한 이들을 오히려 의전에서는 정식 졸업자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고 해석할 수 밖에 없다. 

경성의학전문학교는 1925년경부터 여학생을 공식적으로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1928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 출현으로 여의사 교육의 맥이 다시 이어졌다.

1927년 3월1일 발행된 ‘별건곤’ 제5호의 ‘해내 해외(海內 海外)에 헛허저 잇는 조선여의사 평판기, 해마다 늘어가는 그 수효 잇다금은 해외에서도 활동’이란 제목의 긴 기사로 당시 활약한 안수경 등 여의사들의 활약상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기사는 부정적 시각도 있다. 남녀 내외관습에 대한 편견 탓에 1920년대 조선에서 여의사양성은 배제되고 진척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시대배경을 감안할 때 안수경과 김해지, 김영흥과 그 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김영실, 고수선, 윤범영 등도 묻혀 있으나 한국 여의사 역사 속 큰 자취를 남긴 근대화 초기 여의사들이다. 이들의 존재와 헌신은 로제타 홀과 메리 커틀러 같은 벽안의 여의사들의 적극적 행보와 열정, 무엇보다도 본인들의 도전과 노력 덕분에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