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만의 韓 WMA 회장···“의사의 자율성·독립성 확립 목표”
[인터뷰] 박정율 세계의사회(WMA) 차기 회장
지난해 촉발된 의정갈등을 비롯해 우리나라 의료계를 둘러싼 여러 혼란 속에서도, K-의료의 국제적 위상은 빛나고 있다.
한국인이 전 세계 1100만명의 의사를 대표하는 수장 자리에 올랐다. 바로 박정율 대한의사협회 국제협력위원장이다. 한국 의사가 세계의사회(WMA)의 회장으로 당선된 것은 1985년 고(故) 문태준 회장 이후 40여년 만이다.
세계의사회는 전 세계 118개국 의사협회의 국제적 연합체이다. 의료와 윤리, 의학교육은 물론 건강과 관련된 인권 전반에 걸쳐 가능한 한 최선의 국제적 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전문가적 자율성과 외부 영향을 받지 않은 독립적 임상 진료를 보장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미션으로 정하고 있으며, 이렇게 마련된 기준들은 각국의 의료 정책 및 제도와 실제 임상 현장에서 중요한 준거로 활용된다. 대표적으로는 ‘헬싱키 선언’이나 ‘제네바 선언’ 등이 있다.
대한의사협회 출입기자단은 지난 11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관 대강단(지하 1층)에서 박정율 차기 회장을 만나 우리나라 의료 현안들에 대한 국제사회의 시각과 차기 회장으로서 앞으로의 각오를 물었다.
그는 이번 당선을 ‘개인의 영예’보다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 의사들의 노력의 결과’로 돌리며, 특히 우리나라 의료계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거운 책임감을 전했다.
다음은 박정율 차기 회장과의 일문일답.
세계의사회 차기 회장 당선을 축하드린다.
- 차기 회장으로 선출돼 정말 영광스럽고 감사한 마음이다. 다만, 지금 한국 의료가 여러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어, 기쁨보다 책임감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선출은 개인의 영예라기보다는, 우리나라 의사들이 국제사회에서 그동안 해 온 역할과 노력이 함께 인정받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특히, 1985년 고(故) 문태준 회장이 세계의사회 회장으로 취임해 한국 의료계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이셨고, 그 이후에도 대한의사협회가 꾸준히 이사국으로 참여하며 주요 정책과 의사결정 과정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한국 의료계가 겪고 있는 현실과 고민이 더 이상 국내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국제사회와 함께 논의하고 지혜를 모아야 할 사안임을 보여주는 계기이기도 하다. 앞으로 세계의사회 회장으로서 각국 의료계와 긴밀히 협력해 글로벌 보건의료 과제에 대응하는 한편, 한국 의료가 안고 있는 현안과 문제 역시 국제사회에 정확하게 전달하겠다.
임기 동안 꼭 이루고 싶은 핵심 과제(Signature Initiative)가 있다면?
- 세계의사회의 회장은 차기 회장-현 회장-직전 회장으로 이어지는 3년 임기의 회장단 체제로 운영된다. 따라서 차기 회장으로 선출된 지난해 10월 이후 이미 회장단의 일원으로서 활동을 시작했으며, 올해 10월 정식으로 WMA 회장에 취임할 예정이다.
반드시 의미 있는 성과를 남기고 싶은 핵심 과제가 있다면, ‘의사들의 전문적 자율성과 독립성의 확립’이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이미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있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일부 국가에서는 아직 충분히 구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세계의사회 회장으로서 모든 회원국의 의사들이 정치적·행정적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전문성과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소신 진료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쏟고자 한다.
궁극적으로는 특정 국가들을 대변하는 회장이 아니라, 전 세계 의사들이 최고의 윤리지침과 규범을 바탕으로 전문적 자율성과 독립성을 존중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한 리더로 기억되고 싶다. 의료가 정치나 이념의 도구가 아니라, 과학과 윤리, 그리고 환자 중심의 가치 위에 설 수 있도록 국제사회의 공감을 이끌어 낸 회장으로 남는 것이 저의 바람.
2026년 WMA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 현재 118개국 의사회가 정회원으로 가입해 있으며, 정기적인 이사회와 총회 및 상시적인 논의를 통해 국제적 보건의료 현안과 각국이 직면한 문제들을 자유롭게 공유하고 도움을 주고자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
세계의사회는 매년 약 20~30개의 주요 의료 정책을 개발하고, 그 중요도와 시급성에 따라 성명서(statement)·결의안(resolution)·선언문(declaration) 등으로 구분해 발표한다. 이러한 문서들은 국제적으로 합의된 의사 사회의 공식 입장으로, 각 회원국이 자국의 의료 정책과 제도에 반영되는 중요한 기준으로 활용된다.
118개 회원국 중 한국 의료계의 실질적 영향력과 한국 의사들에 대한 평가가 궁금하다.
- 세계의사회 내에서 대한의사협회는 오랜 기간 이사국이자 핵심 회원국으로 활동하며, 주요 정책과 윤리 논의 과정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왔다. 118개 회원국이 함께하는 조직에서 한국 의료계는 단순히 지역 대표성을 넘어, 실제 논의의 방향과 내용에 기여하는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의사와 한국 의료 역시 이제 문화적 영역을 넘어 ‘K-medicine’이라는 이름으로 전문성과 신뢰와 함께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WMA의 결의문이나 활동이 대한민국 의료 제도에 영향을 미친 결정적인 사례가 있다면?
- 2005년 황우석 사태 이후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이 정비되는 과정, 2008년 서울에서 열린 WMA 총회에서 채택된 ‘의료 전문가 자율성에 관한 서울 선언(Declaration of Seoul)’, 2017년 WMA 총회에서 개정된 ‘제네바 선언(현대판 히포크라테스 선언)’이 국내 의사윤리강령에 즉각 반영된 사례 등이 있다.
개정된 제네바 선언의 경우 의사의 의무로서 환자뿐 아니라 의사 본인의 건강과 자기 관리(Self-care)에 대한 조항이 새롭게 포함됐고, 대한의사협회는 이를 근거로 전공의 과로 문제·전공의법 논의·의사 인권 보호 정책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윤리적·국제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의대 증원 과정에서도 WMA가 목소리를 낸 바 있다.
- 적정 의사 수 확보와 배출 관련 문제는 한국만의 과제가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에서도 공통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문제이다. 다만, 증원 논의에 앞서 우선 전제돼야 하는 것은 해당 국가의 의료 수준이나 요구도 뿐 아니라 국제적 인증에 부합하는 의료인을 양성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교육·수련 인프라가 먼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의사회가 일관되게 강조해 온 ‘글로벌 스탠다드’ 역시 이러한 맥락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준비와 검증 없이 시행될 경우 의학교육의 질과 환자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신중한 접근과 장기간의 숙고와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의사들의 ‘단체행동’과 ‘번아웃 문제’에 대한 WMA의 입장은 어떤지?
- 지난해 세계의사회가 한국 의사들의 단체행동에 대해 지지를 표명한 것은 ‘의사의 전문적 자율성과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국제적 윤리 원칙을 환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WMA는 어느 국가에서든 의사가 합법적 절차와 윤리적 기준을 지키면서 의료 환경과 근무 조건 개선을 요구할 권리가 있음을 강조해 왔다. 이러한 권리는 단기적인 법적 평가를 넘어, 장기적으로 환자와 사회 전체의 이익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고 보고 있다.
동시에 WMA는 환자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명확히 하고 있으며, 국제 윤리 가이드라인에서도 의사의 권리와 환자 안전이 충돌할 경우 균형과 최소한의 환자 보호가 유지되어야 함을 강조해 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가 지속 가능하도록 두 가치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이다.
또한, ‘번아웃 문제’와 관련해서는 의료진들의 과도한 희생과 극심한 노동 강도에 의존해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 단기적으로 의료 공백을 막는 효과가 있을 수는 있지만, 의료진의 건강 악화를 구조적으로 방치한다는 점에서 환자 안전과 의료의 질을 동시에 위협하는 매우 취약한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WMA는 2017년 개정된 ‘제네바 선언’을 통해 의사의 건강권을 환자 안전의 전제 조건으로 분명히 했으며, 2025년 포르투 총회에서 개정·채택된 성명서에서도 ‘의사의 신체적·정신적·사회적 웰빙’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환자 치료의 질과 공공의 신뢰에 직결되는 핵심 요소’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러한 국제적 기준에 비춰 볼 때 충분한 인력·제도적 보완 없이 기존 의료진에게 업무를 전가하는, 이른바 ‘갈아 넣기식’ 대응은 WMA가 제시하는 글로벌 스탠다드와는 거리가 멀다.
의사의 번아웃을 구조적으로 방치하는 정책은 결코 환자 중심적일 수 없으며, 지금 당장의 단기적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근본적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26년을 맞는 한국 의료계와 정부에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2026년은 갈등을 넘어 ‘국제적 표준에 부합하는 의료 재건과 회복, 그리고 미래를 위한 의료’의 원년이 돼야 한다.
국가 의료 정책의 수립은 수치와 통계를 넘어선 '생명'의 영역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존중돼야 한다. 일방적인 추진보다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적합한 법적 및 절차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적 대화와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의료계와 진정한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전향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또한, 의료계의 진정한 회복은 기본 원칙으로 돌아가는 데서 시작된다. WMA는 한국 의사들이 국제무대에서 고립되지 않고 전문직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며, 한국 의료가 세계적인 모범 사례로 다시금 도약할 수 있도록 글로벌 네트워크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지원하겠다.
결국 의료의 본질은 환자와 의사 사이의 ‘신뢰’에 있고, 정부와 의료계가 상호 존중을 통해 이 신뢰를 회복할 때 한국 의료는 다시금 세계의 정점에서 빛날 것이다. 그 여정에 저와 세계의사회가 늘 함께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