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점동(에스더), 사랑으로 환자를 돌보는 의사가 되다

안명옥의 ‘역사를 만든 여의사들’(8)

2026-02-06     안명옥 前 차의과학대 교수(제17대 국회의원)

김점동 부부와 로제타 홀 가족은 1894년 12월7일 한국을 떠나 1895년 1월14일 로제타의 고향 리버티 집에 도착했다. 곧 로제타는 딸 이디스를 출산했고 김점동은 로제타 곁을 지켰다. 또한, 김점동은 의대 입학을 위해서도 많은 준비가 필요했기에 미국에 정착하자마자 2월1일 리버티 공립학교에 입학해 미국 고등학교 과정을 밟았다. 

이때부터 그는 미국 관습에 의해 박에스더로 불린다. 결혼 기간은 남편 박여선이 운명을 달리할 때까지 총 7년이었다. 한국에서는 김점동은 로제타 홀과 서울에, 남편 박여선은 윌리엄 홀과 평양에 있으면서 각각 기거했다. 미국에서 생활한 기간은 약 5년, 여러 여건으로 함께 있는 날은 많지 않았다. 김점동, 그의 한국 이름이 존중됐으면 좋겠다. 그러나 13세에 자신이 선택한 세례명 ‘에스더’는 ‘별’의 의미로 김점동이 큰 의미를 두었을 것이고 미국 체류때도 에스더로 불렸을 것이므로 존중하는 의미에서 이제 에스더로 칭한다. 

에스더는 주중에는 리버티 시내에서 기숙하며 공립학교를 다녔고 주말에는 로제타 아버지의 농장, 남편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남편 박여선은 농장에서 일하며 월급을 받아 에스더 공부를 도왔다. 방학이 돼 가족 모두 캐나다의 윌리엄 홀 부모님 댁을 찾아 5주간 머물며 근처 교회들에서 한국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그들이 에스더의 학비 모금에도 도움을 줬다.

리버티로 돌아온 후 1895년 10월부터 에스더는 뉴욕시 유아병원에서 일 년가량 수간호사 보조로 일해 생활비를 벌며 의대 입학을 위한 △라틴어 △물리학 △수학 등을 개인과외를 받아 열심히 준비했다. 이 시기에 에스더는 1896년 2월21일 딸을 낳았는데, 폐렴에 걸려 3월13일 아기가 세상을 떠났다. 에스더는 아기를 잃은 아픔을 딛고 1896년 10월1일, 19세 때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Baltimore Women’s Medical College)에 최연소 학생으로 입학했다.

한편 1896년 9월 로제타는 뉴욕의 국제의료선교회에서 일하게 돼 박여선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했다. 한국에서는 로제타와 친지들 도움으로 1897년 2월 1일 ‘윌리엄 홀 기념병원(일명 기홀병원)’이 평양에 개원했다. 로제타는 한국으로 돌아가 의료선교를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에스더의 어려움도 알고 있는 터라 에스더에게도 한국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에스더는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며 학업을 마치겠다는 강한 의지를 편지를 통해 로제타에게 전달했다. 

에스더는 20세 비교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길을 선택했다. 로제타는 아들 셔우드와 딸 이디스와 함께 1897년 9월6일 한국으로 향했다. 의학수업을 향한 에스더의 강한 의지를 볼 수 있는 편지를 소개한다. 

저는 당신이 저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체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이 한국으로 돌아가 제가 준비될 때까지 우리의 불쌍한 자매들을 도왔으면 합니다. 저는 하느님이 저를 돕기 위해 훌륭하고 헌신적인 친구를 보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제가 지금 이것을 포기하면 다른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고, 최선을 다한 후에도 배울 수 없다면 그때 포기하겠습니다. 이전에는 아닙니다.

1899년, 졸업을 한 해 앞둔 시점에 에스더를 물심양면 지원하던 남편 박여선이 폐결핵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에스더는 독지가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의학공부를 하며 남편의 병원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남편 병간호도 함께 해야 했다. 에스더의 치열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편 박여선은 에스더가 졸업시험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인 1900년 4월28일 사망해 볼티모어 로렌 파크 공동묘지에 묻혔다. 에스더 나이 23세였다. 

남편을 잃은 슬픔 속에도 졸업시험을 통과한 에스더에게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할 기회가 주어졌으나, 그녀는 이를 거절하고 고국의 여성과 국민을 위해 생을 바치겠다는 생각으로 졸업과 함께 1900년 10월 귀국했다.

귀국 후 평양 기홀병원에서의 의료활동 

귀국한 에스더는 로제타가 일하고 있던 평양 광혜여원에 바로 합류했다. 에스더가 평양에 도착하고 10개월간 로제타는 간간히 모든 일을 에스더에게 맡기고 지방 선교 활동을 전개했다. 로제타가 격무로 쇠약해진 바람에 1901년 3월에는 에스더에게 모든 일과 아들 셔우드까지 맡기고 요양을 위해 서울로 간다. 

로제타는 요양을 위해 안식년으로 1901년 6월7일 미국에 돌아가게 되고 그동안 보구여관을 맡았던 여의사 메리 커틀러도 안식년으로 미국에 가게 돼 보구여관을 에스더가 책임지게 된다. 평양 광혜여원은 당시 동대문 진료소를 맡고 있던 릴리언 해리스가 맡게 됐다. 

다시 보구여관으로…

에스더는 1901년 7월부터 어린 시절 의학에 눈뜨는 계기가 됐던 보구여관의 책임의사로 부임해 환자들을 치료했다. 왕진 활동도 활발했다. 에스더는 보구여관 지소 여의사인 엠마 언스버거와도 서로 돕고 세브란스병원 의사 에비슨의 도움도 받으면서 보구여관을 운영했다. 진료 외에도 여전히 미신적 치료에 많이 의존하는 당시 상황에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건강(보건)교육에도 열심이었다.

1902년에는 콜레라가 창궐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자, 에스더는 적극적인 치료를 위해 전도부인과 함께 환자들 집까지 방문해 약을 주며 치료에 앞장섰다. 보구여관 진료사업은 나날이 확장됐다. 에스더는 업무시간은 물론 진료가 끝난 시간에도 진료를 마다하지 않았고, 일요일까지도 치료에 임했다. 휴가 때마저도 매일 집으로 찾아오는 환자들을 치료했다. 에스더의 의료활동에는 전도부인인 데레사와 두 조수 김배세(김점동의 동생), 이 그레이스가 참여했다. 1903년 서울 보구여관 근무 즈음에 에스더는 간호원 양성소 설립 임무를 띠고 입국한 간호선교사 마거릿 에드먼즈의 간호원 양성소 설립과정에도 관여했다. 

1903년 3월 안식년을 마치고 여의사 메리 커틀러가 보구여관으로 돌아오자 에스더는 다시 평양으로 갔다. 에스더는 1904년에는 러일전쟁의 혼란 탓에 평양을 피해 잠시 서울로 왔다가 시국이 안정되자 곧 평양으로 복귀했다. 

에스더는 진료뿐 아니라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위생과 성경강의를 동시에 했다고 전해진다. 전도사업을 위해 일년에 수백 군데를 다녔다고 하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추정할 수 있다. 1903년 가을에는 여성해외선교회로부터 선교활동 대상지역으로 황해도 700리를 할당받았다고도 한다. 주민들의 삶에 열정과 정성을 담아 최선을 다하는 행동과 교육활동을 통해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선교활동과 의료활동의 와중에 건강을 차츰 잃게 된 에스더는 1905년에는 폐결핵으로 자리에 눕게 된다. 9월 요양차 중국 남경에 갔다가 귀국한 후에는 간헐적으로 의료, 전도사업에 임하다가 몸이 더 쇠약해지면서 번역, 주일학교 일을 돕는 역할을 했다.

1909년 4월 28일 언더우드, 윤치호, 김필순 등의 발의로 외국에서 유학한 후 헌신적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박에스더, 윤정원, 하란사 3인이 초청돼 경희궁에서 ‘초대 여자 외국 유학생 환영회’가 열렸다. 내.외빈 700여명이 참석한 환영회였다. 일찍이 유학을 다녀와 신학문을 익히고 한국 의료 근대화에 이바지하고 있던 김점동(박에스더)의 헌신적 활동이 국가적으로 인정을 받은 행사로 당시 서울 장안의 칭송 대상이었다. 

1909년 가을 성경학교를 마지막으로 에스더는 평양에서 서울로 와서 작은언니 신마리아 집에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10년 4월13일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귀국 후 환자들 치료에 진력하고 교육활동과 더불어 하느님 말씀을 행동으로 전하며 국민과 하느님께 헌신하며 환자를 돌본 한국 최초의 의사 김점동(박에스더)은 진료현장에서 폐결핵에 걸려 짧은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