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의사 탄생의 뿌리, 근대여성교육의 시작
안명옥의 '역사를 만든 여의사들' (2)
2025년은 1900년 김점동(金點童: Ester Kim Pak, 박에스더 : 남편 이름이 박여선)이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환자를 돌보는 한국인 첫 의사가 된 지 125주년 되는 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의사로 알려진 서재필이 쑨원(孫文) 같은 의사가 되려고 미국 콜롬비안 대학교 의과대학(현 조지 워싱턴 의대)을 졸업한 1892년에서 8년 후 일이다.
서재필은 병리학자고, 한국에서의 활동은 독립신문 발행, 외교관, 중추원 고문 등의 국가 자문관 활동이었으므로 우리나라 최초로 환자를 돌보는 첫 서양의학 의사는 김점동이다. 한편, 한국 최초로 일본에서 근대 의학을 공부한 김익남은 1899년 도쿄 자혜의원의학교를 졸업했다. 도쿄자혜의원 당직 의사로 근무하다가 일본에서 환자를 볼 의사는 없었으므로 의사자격증 시험은 보지 않고 1900년 8월(귀국은 김점동보다 2달 앞선다) 귀국했다. 11월부터 의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어 일하기 시작했으나 환자 진료는 수년 후부터 시작했다.
필자와 필자의 어머니, 이모도 여의사의 삶을 살았다. 자매뿐인 어머니와 이모는 1940년대 고려대 의대 전신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졸업생이다. 어머니는 5회 졸업, 이모는 3회 졸업이고, 어머니 졸업장 번호는 191호다. 2006년 선종하셨지만, 어머니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며 지난 5년간 ‘역사를 만든 여의사들’을 저술해 올해 발간했다. 이 책은 어머니에게 드리는 사랑과 존경과 감사의 작은 표현이자 헌정의 마음을 담았다.
한국 여의사의 역사는 근대화 이후 여성 사회 진출에서 대단한 역사성을 가진다. 자유롭게, 비교적 가장 존중을 받으며 전문직으로 사는데 이상적인 전문직이었다. 또한 한국 여의사의 역사에서 시작된 여성 과학자들의 역사도 점점 각 분야 진출이 많아지며 분화되어 최근에는 첨단 과학 각 세부 분야에서 여성 약진이 진행되고 있다.
2025년 현 시점, 전체 의사수는 14만1000여명, 여의사 수는 3만9000명을 넘어섰다. 여의사의 역사는 제중원 창설 다음 해인 1886년에 제중원에 애니 엘러스(Annie Ellers)의 내한으로 시작된 여성진료와 부녀과 창설로 시작돼 실상 한국의 현대의학의 시작과 맥을 함께 한다. 그러나 한국 근대 서양의학사는 거의 남자의사들의 역사로 정리돼 있다. 여의사의 역사가 앞으로 더 깊고 넓게 잘 정리되기를 희망하며 초창기 여의사들의 행적을 정리했다.
많은 여성 의료 선교사 중 초기 3명의 여성 의료 선교사와 우리 초창기 여의사들 중 9명, 예수님의 첫 12 제자를 생각하며 12명의 행적을 정리했다. 이 작업은 단지 시작이다. 앞으로 더 많은 사료작업의 후속 연구와 저작들이 이루어지기 바란다. 방대한 자료가 맥을 이루며 정리돼, 한 분 한 분의 존재가 여의사의 역사는 물론 대한민국 여성과 사회에 미친 지대한 영향들의 기록으로 재조명되기 바란다. 또한 그분들의 삶에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그리고 우리의 나날의 삶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면 좋겠다.
학문적으로 정확을 기하고자 50여편의 관련 서적과 백수십편의 학술논문, 그 외에도 과거 신문 자료들, 조선총독부관보 원전 등 방대한 자료들을 분석, 정리했으나 독자들이 여의사의 역사에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즐거운 작업이었다. 291쪽 분량의 책이지만, 의사신문을 통해 간략히 약 10회에 걸쳐 소개한다. 앞서 척박한 길들을 개척하신 선배 여의사 선생님들과 창대한 미래를 열어가는 이시대 모든 (여)의사 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이 글을 연다.
우리나라는 19세기 말 개항과 더불어 격동의 시기에 비로소 근대화에 접어든다. 근대 여성교육은 서양의학의 도래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한, 그 교육의 시작은 기독교 선교로부터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서양의학의 도래, 그리고 여성교육의 시작
서양의학이 처음 우리나라에 도입된 때는 1760년경 ‘주제군징’(1629) 등 의학서적들이 성호 이익 등에 의해 소개되면서부터다. 하지만 실질적으론 고종 13년(1876) 조일수호조약 이후 일본인들이 부산.원산.서울.인천 등 개항지에서 서양의학식 병원을 개설하며 간접적으로 독일의학이 소개되면서 시작됐다. 고종 21년(1884) 갑신정변 때 미국 의료선교사 알렌(安連: Horace Newton Allen)이 중상을 입은 민영익의 부상을 치료했던 계기로 알렌의 건의에 의해 이듬 해인 1885년 4월 10일, 홍영식의 집에 왕립병원인 광혜원(廣惠院)이 개설됐다. 이어 2주 후에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됐다.
근대 여성교육의 시작
우리나라 근대 여성교육은 북감리교 선교사인 의사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이 1885년 5월 3일 조선에 도착한 후, 뒤이어 입국한 스크랜튼의 어머니 스크랜튼(Mary E. Scranton) 여사에 의해 시작됐다. 의사인 스크랜튼은 입국 후 제중원에서 알렌을 도와 일했다. 그 후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인 헤론(John Heron, MD)이 입국하자 스크랜튼은 같은 해 9월 10일부터 자신의 집에서 병원을 개원했다. 1886년 6월 15일에는 이 병원이 시병원(施病院)으로 발전하게 됐다.
한편, 앞서 언급한 스크랜튼의 어머니 스크랜튼 여사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부부가 1885년 6월 20일 한국에 도착하여 이웃하며 살게 됐다. 1885년 9월경부터 아펜젤러는 자신의 집에서 2명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배재학당의 시초다.
이웃 스크랜튼 여사는 1885년 10월에 여성교육을 위해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에 부지를 구입하고 건물을 세운 후 1886년 5월경부터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887년 2월에는 고종황제가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하사했다. 조선의 서원에 비견될 수 있는 이 이화학당이 국가로부터 공식적 인정받은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다. 한 사람의 여학생으로 시작한 이 학교에 1886년 11월 들어온 4번째 학생이 바로 우리나라 첫 (서양)의사가 되는 김점동(박에스더)이다.
당시 조선의 문화와 맞물려 내외법 등으로 여성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여의사가 절실히 필요했다. 알렌은 지속적으로 미국 북장로교 교단에 여의사 파견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최초의 여성 의료선교사인 애니 엘러스가 1886년 7월 4일 한국에 왔다. 록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턴 의과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둔 의과대학생이었던 애니 엘러스는 제중원에 도착한 날부터 신설된 부녀과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동시에 명성황후의 주치의로도 활동했는데, 그 공로가 인정돼 정경부인 벼슬을 받았다.
1887년 7월 선교사인 벙커(Dalzell A. Bunker)와 결혼하기 직전인 6월 다섯 살 난 여아를 집에 데려다가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888년 3월 12일에는 자신의 집에서 15세의 학생 두 명으로 ‘정동여학당’이라는 여학교를 열고 당장(교장)으로 일했다. 공식적으로 한국 선교부에 등록된 서울 선교지부의 여학교였다. 후에 정신(貞信)여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는 매일 직접 학생들을 가르쳤고, 의료 사역을 후임인 릴리어스 호튼(Lillias Horton)에게 인계한 후부터는 여학교 운영에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았다. 애니 엘러스는 YWCA 창설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 의과대학 마지막 학기를 졸업하지 않게 된 것은 오로지 미 북장로교 선교회의 간곡한 요청과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선교회는 조선에 여의사를 빨리 파견해야 했으므로 조선에서 2년 봉사한 후 다시 귀국하여 학위를 마치게 하겠다는 조건하에 애니 엘러스는 난감한 수락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사회에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초기 의료사업과 초창기 여성교육분야 및 여성운동에 그가 미친 영향은 매우 커서 결코 과소평가되거나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후에 더 자세히 그의 삶을 살펴볼 것이다. 이렇게 조선에서 여성들의 근대교육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