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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에하루에게 눈병을 치료받다 <33>
다카하시 에하루에게 눈병을 치료받다 <33>
  • 의사신문
  • 승인 2007.11.21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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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이후에도 여전히 이것을 시험하기를 원하여 메이지 10년(1877)의 전쟁이 끝나자 이시카와는 류마티스 때문에 아리마(有馬: 코오베(神戶)시에 있으며 일본서기에도 나오는 일본 최고의 온천지) 온천행을 청하였다.

내가 말하길, 마땅히 마이코( 舞子)에 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시카와는 이에 따라서 마이코노 하마(舞子浜: 神戶市 垂水(다루미)區의 明石海峽(아카이시)해협에 면한 해안)의 여사(旅舍)인 귀실(龜室)에 체재하며 바닷물로 목욕하고, 크게 효과가 있어 돌아갔다.

이후 점점 이것을 확산시키고 싶었고 또 전국민성의 선악, 지방병 및 병명이 같지 않은 것 등을 탐구하고 싶어서 산수 승지(山水 勝地)를 찾아서 해마다 사방으로 만유(漫遊)하기를 거의 20여 년, 그간 의학에 관하여 다소의 도움을 얻은 바가 또한 적지 않았다.

메이지 17년(1884) 이즈(伊豆)의 아타미(熱海) 온천에 놀러가서 쇼오슈 오다와라(相州小田原: 가나가와 현 지역)에 체재하였는데, 장래에 반드시 지치고 쇠약케 될 것을 생각하여 토인(土人)에게 해수욕장을 설치할 것을 이야기 하였는데 모두 마이동풍으로 나의 설명을 듣는 자가 없었다. 곧 인연이 없다 싶어 떠났고 도중에 오이소(大磯)를 지나갔다.

이 지역에 옛 문인이 있어서 그를 방문하였다. 폐촌(弊村:저희 마을)도 해안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내가 크게 기뻐하며 나아가서 보니 그 지세, 해조가 다른 지방보다 매우 우월하였고, 기후는 따뜻하고 산도 아주 높지 않았다. 해중(海中)을 살펴보니 모두다 완전하였다. 따라서 驛의 중앙 미야시로실(宮代室)에서 숙박하면서 토인(土人) 가운데 뜻이 있는자 2, 3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때는 驛中의 피폐가 매우 심하여서 자산(資産)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집에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따라서 해수욕이 사람들에게 이익이 있음을 설명하며 백방으로 권유하였는데, 미야시로신타로(宮代新太郞)이라는 자는 집 또한 궁색하지 않아서 이것을 설명하였고 그밖에는 설명한 보람이 없었다.여관의 미야오오 켄키치(宮大謙吉)이라는 자(이 땅에는 미야시로(宮代)라는 성이 매우 많았다)는 꽤 학식이 있었고 인망도 있음으로 이것을 설명하였다.

켄키치(謙吉)은 크게 기뻐하였지만 그 군장(郡長)이 매우 우둔하여 설득되지 않았다. 따라서 켄키치는 스스로 분주하여 동지를 모을 것을 기약하였다. 18년(1855) 여름에 계획이 거의 완성되었고 게다가 근방의 사람들이 이것을 듣고 해수욕하러 오는 자가 일시에 매우 많아졌다.

19년(1886)에는 토오쿄오 사람을 유치하여서 내박(來泊) 하는 자가 100여 명에 이르렀고 가을 초에는 콜레라의 유행으로 오는 사람이 크게 감소하였다. 20년에 이르러서 철도가 완성되었고, 토오류우칸(濤龍館) 또한 완공되어서 케이힌(京浜)으로부터 오는 욕객(浴客)이 많아서 혼잡이 극심하였다. 이후 해마다 번창하여 10년 전의 피폐는 완전히 흔적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단지 해수욕의 공력만 알고 그 찬지(撰地)의 일은 알지 못했다. 때문에 노파심에 되풀이하여 약간 욕장의 요점을 아래에 게재한다.

첫째, 서북으로 산을 등져야 하고, 산은 아주 높지 않아도 된다. 모름지기 서북의 한풍(寒風)을 막기에 충분해야 한다.

둘째, 땅은 동남으로 면하여 일찍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기가 좋도록 하여야 한다.

셋째, 해조의 간만의 차가 클 것.

넷째, 모래사장이 넓고 청결해야 하며 특히 조개껍질이 적은 곳이어야만 한다. 도기(陶器)의 파편, 사금파리 등도 틀림없이 주워서 버려야 한다.

다섯째, 해중(海中)에 하천의 물을 섞을 것. 가능하면 적게. 오이소에서 서쪽으로 사가와 가와(酒瓦)는 서류(西流)하고 동쪽으로 사가미 가와(相模川)가 동류(東流)하여 모두 오이소(大磯)의 해중으로 흘러 들지 않는다.

여섯째, 하저(河底) 모래, 자갈 혹은 암석일 것.

일곱째, 파격(波擊)은 강력히 밀어 올리고 퇴거(退去)에는 힘이 적어서 그것이 사람을 박격(搏擊)하는 것이 꽤 강한 것이 좋다.

여덟째, 욕자(浴者)에게 위험의 우려가 없게 그 준비가 있어야 한다.

아홉째, 조수 중에 염분이 가장 많은 것이 좋다.

열째, 해수의 한난(寒暖)이 날마다 같게 할 것.

오이소에는 이러한 열 가지가 준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요코하마, 토오쿄오로부터 왕복하는 기차가 매일 7, 8회로 가장 편리하기에 아침에 와서 저녁에 가는 사람이 꽤 많았다.

난환고질(難患痼疾)에 약효가 듣지 않는 자가 건강을 회복하는 경우를 일일이 셀 수가 없었다. 게다가 부귀한 사람들은 땅을 구입하여 별장을 운영하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점점 많아져 지가(地價)가 그 때문에 등귀하였고 옛날과 비교하여 백배에 달하는 곳이 적지 않았다. 과연 그렇다. 토인의 기쁨은 한이 없었다.

내자는 토인을 주의 하여야한다



해수욕은 위장병, 류마티스통, 신경통, 하지불수(下肢不遂), 식기불진(食氣不振), 카타르(子宮加答兒), 빈혈증, 안면통 등에 가장 효과가 있었다.

27년(1894) 1월, 이즈(伊豆) 슈젠지(修善寺)로 가는 도중에 북풍을 만났는데 (바람이) 차고도 강하여 온천 여관에 이르렀을 때는 양 눈에 조금 통증을 느꼈다. 자주 세척하여 조금은 상쾌해짐을 느꼈다.그러나 휘호(揮毫)를 부탁하는 자와 진찰을 청하는 자가 종일 계속해서 오므로 이후에 병자는 오후에, 휘호는 이른 아침부터 11시까지로 한정하였다.

이로 인해 안염(眼炎)은 낫지를 않았다. 4, 5일이 지나 대설로 인해 은세계가 펼쳐져서 눈부심이 심해졌기에 눈이 녹는 것을 기다려 집으로 돌아왔다. 세척을 하였더니 카타르가 크게 경쾌하였다.이후에 생각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더니 때때로 카타르에 걸리는 일이 여러 번 있어서 다음 해 히로시마(廣島)로 가는 도중에 오오사카 내려 다카하시 에하루(高橋江春) 씨를 초대하여 속치(速治) 부탁하였다.

에하루씨는 웃으며 대량의 초산은(硝酸銀)을 점점이 떨어뜨리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다음날 히로시마(廣島) 이를 무렵엔 거의 다 나은 것 같았다.돌아가는 길은 직행하여 토오쿄오로 돌아왔다. 

김강현 역 <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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