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라의 유행... 격리법 .피병원 폐지 주장 <31>
콜레라의 유행... 격리법 .피병원 폐지 주장 <31>
  • 의사신문
  • 승인 2007.11.0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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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길, 남자는 눈비를 무릅쓰고 탄환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있으니 그 곤고(困苦)를 살펴야 한다. 다만 부녀자는 깊은 궁궐에서 생활하고 고량(膏粱)으로 포식하면서 따뜻하게 잠자는데 그 행복은 모두 전사의 공로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부상자를 위하여 면철사를 만들고 이를 부상자에게 주어야 한다며 그 대부분을 전쟁터로 보내었고, 이 때문에 사기가 떨쳐 일어났다고 말하고, 우리 황후폐하는 최고로 현명하기에 바라건대 이를 임금께 상주하는 것이 어떠하냐고 물었다.공이 말하길, 아름다운 일이다. 신속히 임금께 아뢰어야 한다고 하였다. 가마를 명하여 입궐을 하였다. 나는 군의부를 물러 나왔다.2, 3시간이 지나서 궁내성(宮內省)으로부터 사명이 와서 철사(撤絲)제조를 가르칠 자를 보내라는 내칙이 있었다. 때문에 명에 따라서 사람을 보내었다. 그리고 모든 장교의 처녀들은 앞다투어 이것을 본받았다.

이를 사방에서 듣고서 칸토오(關東)의 모든 여학교 및 토오쿄오의 상인들이 각자 본면을 헌납하는 자가 날로 늘어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이고 군 병원의 사무소 내에 쌓을 곳이 없었고, 창고는 이것 때문에 송곳 꽂을 땅도 없을 정도였다.붕대는 한번 사용하여 개신하고 한편 붕대를 풀 때는 모두 가위로 종재(縱裁)하였기 때문에 환부를 움직이지 않아서 부상자는 고통이 없었고, 따라서 치료가 매우 빠르다고 하였다. 27, 8년(1894∼1895) 지나(支那)와의 전쟁에서도 여전히 남은 양이 적지 않았다. 나의 희열을 알만 할 것이다.

사토오 스스무



사토오 스스무가 군의감으로 오오사카에 와서 군사병원에서 종사하면서 사지 절단술을 행하는 바가 매우 많고 이에 따라 다른 외과수술을 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서 장년의 군의·조수로 하여금 이것을 배우게 했는데 육군 군의과(軍醫科) 모두에 통달한 자가 많았다. 이 전쟁에서 부상자의 사망률을 계산하니 100분의 1 정도였다. 내가 아이즈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그의 공은 8, 9배나 되었다. 그렇지만 비용은 몇 백 배인지 알 수 없다.

또한 대만과의 전쟁에 임해서 열대지방에 반드시 역려(疫쪸)가 많을 것을 헤아려서 미리 화란에서 우수한 퀴닌을 가져온 것이 거의 100파운드나 되었다.

사츠마로부터 온 병졸이 대만열(台灣熱)을 얕보면서 말하길, 역열(疫熱)은 총감이 보내온 백환(白丸)을 복용하면 곧바로 나았다. 어찌 두려움을 갖겠는가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그러나 이 역이 많이 발생하여 한 졸병이 각각 2, 3회를 반복해서 열이 있어서 많던 퀴닌이 겨우 삼천 여명의 군인, 군속에게 주고는 마침내 모자라게 되었다. 다시 이것을 수입하였다. 그것을 다 사용하였을 때 厦門(아모이), 홍콩으로부터 구입한 퀴닌은 효과가 없어서 죽는 자 또한 많았다.

다시 수입한 양품(良品)이 그곳에 도착하자 또 성공은 예전과 같았다. 대장 사이고로 쥬우도오(西鄕從道)도 또한 이 열에 걸려 귀국 후 발열하므로 군의부에 저장된 물품의 용량, 용법을 상세히 적어 이것을 증여하였는데 1, 2회 돈복 후 나았다고 하였다.   우수한 퀴닌

  후에 氏는 미국 박람회의 대표로 주임(往任)되었다. 나는 퀴닌의 유무를 물었다.후작이 말하길, 이번에 가는 곳은 미국이므로 열이 나면 그 곳에서 구입할 것이다. 나 또한 이에 동의하여서 특별히 가져가질 않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또 발열하였기 때문에 우수한 것을 구하여 복용하였는데 효과가 없어 급히 보내 달라는 급신이 있어서 곧바로 증송(贈送)하여 전처럼 신속히 해열되었다.

후작은 크게 놀라서 이것을 미국 의사에게 알리며 동시에 그 물건을 보였더니 대의(大醫)는 크게 놀라서 송구스러워 하며 우리나라에 이런 물건이 있는 곳은 오직 뉴욕의 한 가게뿐으로, 군진(軍陣)이 이것을 복용하려 해도 계관(計官: 금전출납을 담당함)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그 하품(下品)을 쓰는데, 일본의 병졸은 부러울 만큼 행복하다고 말하였다고 귀국 후에 나에게 알려 주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시중에 판매하는 것이 심히 소악(疎惡)하므로 당로(當路)의 의사 및 유사에게 알리더라도 한 사람도 믿는 자가 없다. 나는 이 때문에 영상(英商)과 약속하여 자용(自用: 개인적으로 씀)으로 비축하였다. 그렇지만 그 가격은 거의 10배였다.의가로서 용약(用藥)의 좋고 나쁨을 분별하지 않으면 병사가 총포의 나쁨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목하 대의(大醫)로 자임(自任)하는 자를 욕되게 할 뿐이다.

만일 이 글을 읽고서 좋지 않은 사람은 와서 면론(面論)을 하여도 좋다. 나는 이번의 축하로 많은 의가들의 후의에 감사하고자 할 뿐이다. 서상(書上)의 논의를 주로 하는 것은 소년 의생이다. 적어도 상류의 의사는 체인(體人)의 뜻을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병란이 이미 평정된 후에 장교는 모두 시게미츠 쿄쿠지츠쇼오(重光旭日章)를 하사받았다. 나 또한 그 대열에 끼었다. 아마도 야마가타 후작(山縣 侯)이 논한 데서 연유된 듯 하였다. 나는 늘 유사 귀현(有司 貴顯: 지체높고 이름이 남)과 교제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이것을 즐기며 아첨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최초로 메이지 8년(1875), 콜레라(虎列拉)가 대유행하여 시민들 중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아지자 내무대신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君이 명하여 중앙 위생국에서 전염병 예방법 회의를 가졌다.

의장인 미타비(三たび) 대신 호소카와 쥰지로오(細川潤次郞)가 의장이었다. 나는 콜레라병(虎列拉病)은 전염병이 아니고 보통의 유행병(流行病)이며, 그 치료도 그리 어렵지 않다고 논하였지만 다른 의원은 모두 전염병이라고 논하였고, 화란의 의사인 붓케마, 영국 의사 안데르센 또한 전염병이라고 해서 회의법에 의해 다수로서 결정되어, 내 말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회의 후 회장 호소카와(細川)는 마침내 내 설을 믿어 내각에 헌언(獻言)하여 말하길 마츠모토의 설은 늘 경험설로서 시종 변하는 일이 없으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서양 책을 읽고서 논할 뿐이다. 따라서 이를 다른 데서 찾으니 마츠모토의 말이 모두 증명이 되었다. 때문에 그 설을 좇아 격리법(隔離法)을 버리고 피병원(避病院)을 폐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사진1>

김강현 역 <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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