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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국의부 편제 정비...수의학교 설립 <30>
육군 국의부 편제 정비...수의학교 설립 <30>
  • 의사신문
  • 승인 2007.10.31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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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란이나 정토 사(征討 使)로 종사한 군의는 해·육군 공히 하야시 키(林紀)를 군의총감으로 하였다. 일체의 의사(醫事)를 통할케 하였고 나는 동경에서 그 근본 사무를 주도하였다.

오가타 유준(緖方惟準)은 이 때 군의감(軍醫監: 위생·치료·진찰 등을 관장하는 소장 상당의 장군)이 되어 나가사키의 군의병원장이 되었다. 이전에 사토오 스스무(佐藤進)가 유럽에 유학한 후 귀국하여 대학에서 봉사하려고 하여서 사직하고 나오지 않았다.나는 이것을 듣고 그 아버지 타카나카(尙中)을 방문하여 외과의 명가라고 칭찬하면서 이 전쟁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어떠한가 라고 물었다.타카나카가 대답하길 물론이다. 스스무(進)가 응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이미 허락하였다. 더구나 당신 밑에서 봉직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어서 결코 불복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잘 되어서 신속히 위에 아뢰고자 사이고오 쥬우도오(西鄕從道 :사이고오 타카모리의 동생으로 사츠마 번의 무사, 정치가, 원수, 해군 대장 종1위 大?位 功一級侯爵)와 상의하였다.

氏는 크게 기뻐하며 말하길, 정말 의외의 행운이다 라고 하였다. 곧바로 상주하여 군의감으로 임명받았다. 이어서 하시모토 츠나츠네(橋本綱常: 육군군의총감(중장 상당관). 후에 육군성 의무국장. 륙군군의총감, 동경대학 의과대학 교수, 초대 일본적십자병원 원장을 역임) 또한 귀국하였기에 같이 군의감으로 임명할 것을 청하였다.

쥬우도(從道)는 또한 이에 따라 상주를 거쳐 군의감에 임명하였다. 이 일은 일일이 전지(戰地)에 보고되었는데, 진(陣)에 있는 의사는 모두 불복하며 말하길, 구주에 유학하고 돌아온 자는 일등 군의정 이하로 한다는 규약이 있다.그러나 사토오(佐藤)를 발탁하고 또 하시모토(橋本)를 발탁한 것은 토오쿄오에 있는 총감이 사사로이 일을 처리한 것으로, 한 사람은 그의 종제(從弟)이고 또 한사람은 그의 애제(愛弟)이다. 때문에 정해진 규약을 위배한 일은 전지의 의사들이 도저히 승복할 수 없는 일이다.

카센이 말하길, 하시모토는 육군의 자금으로 유학한 자인데 이찌 이처럼 될 수 있는가 라고 했다. 하야시 총감으로부터 견책의 글이 왔다. 쿄오토에 있는 이시카와(石川)또한 하야시 키와 논의를 함께 하였다.

내가 말히길, 그럼 이케다(池田)을 일등 시의(侍醫)로 하자, 그러면 의감(醫監)과 동렬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바이다. 내각의 사람들은 의사의 양부(良否)를 분별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케다 또한 학비의 절반은 육군이 부담했고, 때문에 귀국 당시 우선 군의부로 출근했다. 내가 이 사람을 시험해 보니 학력이 하시모토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런데 하시모토의 지위를 이케다의 밑으로 두는 것은, 동창의 학문에서 제일이고 그 졸업중 또한 이케다보다 위에 있는데도 내각의 사람들은 이것을 논하지 않고 자의로 이케다을 중용하는 잘못을 하였다. 또 말하길, 만일 양자가 서로 같다면 하시모토는 순수한 육군이고 동료가 아닌가. 사람들은 자연히 친소(親疎)가 있는데도 타인이 그 위에 위치하는 것을 살피지 않고 동료가 등용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것을 은근히 이상하게 여긴다. 군의가 모두 불복하여 모두 사표를 내도 좋다. 불복하는 사람은 등용하지 말고 경 등은 자성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자세히 써서 하야시 총감에게 답하였다. 하야시가 의관 무리들을 모아 그 글을 보여 주었더니 무리들은 뉘우치면서 복명하여 가로되, 전일의 일은 크게 잘못했고 앞으로는 일층 노력을 더하겠으니 바라건대 전서(前書)를 불태워 버려 주십시오 라고 하여 그 죄를 사해 주었다.하나의 작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타인에 대한 것은 깊이 생각하여서 후환이 없게 하는 데는 관대함을 으뜸으로 해야 한다. 하물며 사심마저 있다면 나중에 욕을 먹게 될 것이다.

獸醫(수의)

  어느 날 육군성에서 야마가타 후작에게 의견을 말하길, 인의(人醫)의 일은 나와 속료가 열심히 하여서 대체로 정리가 된 듯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육군에 수의(獸醫)가 없습니다. 이를 외국에서 초빙하는 것이 급히 필요합니다 하였다.

후작이 말하길, 크게 늦은 것을 깨달았으니 신속히 계획을 세우라고 하였다. 급히 프랑스에서 구하여 수의 교사를 초빙하였고 3개월 뒤에 임시로 수의 앙꼬라는 자가 왔다. 곧바로 히토츠바시( 一橋門 :토오쿄오의 지요다구에 있으며 토오쿄오 대학을 위시한 여러 대학이 즐비하였던 곳임)근처에 수의부(獸醫部)를 설치하였다.그리고 종래의 마의(馬醫)는 한방의 보다도 서툴렀고 수의를 아는 자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예전의 막부 마의를 고용하였고 나는 스스로 마의감(馬醫監)을 겸하였고, 시간을 정하여 군의부와 양방으로 출근하였다.

군의총감은 칙임(勅任: 천황에 의한 임명직)이고 마의감은 주임(奏任: 고등관 중 3등 이하 8등까지의 관리)인 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그 호사를 비웃는다고 하지만, 나는 일의 편의를 기뻐했음으로 남들의 비웃음을 사양하지 않았다. 수의는 이를 시초로 한다.

앙꼬가 오자 원래의 마의 중 품행이 좋은 자 4, 5인을 발탁하여서 각자 그 직에 취임케 하고 또 사족(士族: 명치유신 이후 무사계급에게 부여한 명칭)의 아들 중에 20세 미만의 사람으로 하여금 앙꼬를 따라 수의학을 배우도록 하였다.이윽고 일이 정해지자 이시구로 타다노리(石黑忠悳)에게 마의감을 겸하게 하고 이전의 마의 가운데 재주 있는 나이 어린 사람을 이번에는 모두 상진(上進)하여 크게 수의의 학술이 진보하였다. 다음해 내무성(內務省)에서 또 수의학교를 설립하였다.나는 하야시 키를 진급시키고 물러나 사직할 계획이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군의부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거의 퇴직한 자 같이 크게 책임을 벗었다.   황후 폐하의 철사(撤絲)

  서남(西南) 반란(1977년 가고시마(鹿兒島)에서 西鄕隆盛이 일으킨 반란)이 일어나자 어느날 사에우후 이와쿠라 공(前右府岩倉)에게 알현을 청하여서, 옛날 러시아 황후는 전쟁 때에 모든 관녀(官女)를 타일러 스스로 관녀와 함께 면철사(綿撤絲: 외과수술 후 상처에 박는 심지, 무명을 풀어 약물에 적신 것)를 만들게 했다.

김강현 역 <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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