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한치켄 개혁... 군위두로 출사하다 <29>
하이한치켄 개혁... 군위두로 출사하다 <29>
  • 의사신문
  • 승인 2007.10.19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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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하로서 바쿠후(幕府)의 틈을 살피는 것은 본래 당연한 것입니다. 어찌 이것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나는 단지 토쿠가와(德川)의 친번(親藩) 및 보대 신하(譜代 臣下: 에도시대 이전부터 대대로 토쿠가와 집안을 섬겨온 신하) 제후로서 만연(慢然)히 토쿠가와 집안을 적대시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를 미워할 뿐입니다. 말하자면 조의(朝衣:관복)를 입고 분토(糞土)에 앉아 있는 격으로 따라서 함께 조정에 서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야마가타 후가 말하길, 좋다 머지않아 네가 만족할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니 서서히 정돈이 될 때까지는 관아에 나올 필요가 없다. 필요하다면 나의 자택으로 와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병부성 출사의 명령을 받들어 녹(祿)은 다달이 100엔을 지급받게 된다.

내가 사면되고 나서 다른 큰 번에서 채용하려고 시도한 곳이 3, 4군데 있었으나 모두 이를 사절하였는데 그것은 모두 그 신하되기를 거부하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이다(어린시절 이래로 불효불충의 도가 없도록 경계하라는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미끼로 낚은 것을 부끄러워함은 모두 선사(先師)이신 아버님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돈에 좌우되는 것은 나의 품성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따라서 늘 심한 가난으로 곤란하였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웃는 자가 많았다. 내가 란츄(蘭疇)에서 라쿠치(樂痴)라고 호를 바꾼 것은 이 때문이었다. 나는 도리어 세상의 지자(智者)를 비웃는 것이다.

이후 야마가타 후를 방문할 일이 종종 있어서 거의 지기(知己)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후작은 지위가 매우 높아져서 전과 같이 폭담(暴談)을 할 수 없게 되어 점차 음신(音信: 편지)이 드물게 되었다.

후에 하이한치켄(廢藩置縣: 메이지 4년 1871) 전국261개의 번을 페지하고 전국을 3부(府) 302현으로 우선 개편하고 동년말까지 3부 72현으로 만듬 , 즉 봉건제도에서 천황의 중앙집권제로 바뀜)의 령이 있어도 나는 크게 기뻐하였다.

또 육군성의 군의(軍醫)는 규율이 대체로 정하여져서 병부경(兵部卿)의 궁으로부터 군의의 우두머리를 명 받아서 칙임(勅任: 判任官의 상위로 親任官이외 九等으로 나누어 親任官 및 일이등을 勅任官 삼등이하를 奏任官이라고 함)의 말석에 출사하였다.   의자의 찬거   법례에 따라서 군의를 찬출(撰出)하려고 하는데 우선 하야시 키(林紀: 육군 군의감 종5위(從五位))와 이시카와 오오쇼(石川櫻所)를 불러 차관으로 삼고 오가타 유준(緖方惟準)을 일등 군의정(軍醫正)으로 하였다. 이시구로타다노리(石黑忠德: 후쿠시마에서 태어나 서양의학을 배워 육군 위생부를 확립에 진력함. 청일·러일전쟁에서 활약함. 육군 군의총감에 오름. 子爵) 타시로키토쿠(田代基德) 아타치토모(足立寬) 마츠나가 토오카이(永松東海), 도이라이토쿠(土井賴德) 등을 위시하여 국장을 할 자는 대개 대학 사람 중에서 찬용(撰用)하였다. 코오지 마치(麴町: 현재의 지요다 구의 서반부로 에도시대는 부케야시키(武家屋敷)의 지역임) 한조몬(半藏門: 에도성 內郭門의 하나) 밖의 지역에 본병원과 더불어 사무소를 세우고 새롭게 병실과 그 외의 것을 신축하였다.

처음 제후의 관군을 따라서 출병한 자는 모두 그 번의(藩醫)를 따랐다. 그 수가 제각기 같지가 않았고, 종군 의자는 매우 많았다. 이에 더해서 그 학술·기량과 사람 됨됨이를 알 수도 없었다.따라서 각 의장에 명하여 종군의(從軍醫)의 성명을 기록케 하고 그 학술·인물의 등급을 정하여 순차적으로 기명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것을 열람하였는데 매우 다수여서 채용이 곤란하였다.   의사 시험


우선 반 이하를 잘라서 고향으로 보내고 남은 사람은 우선 의학 시험으로 등급을 정할 것을 시달하여 오가타(緖方), 하야시(林) 두 사람으로 하여금 문제를 만들게 하였다.두사람은 앞서 화란에서 유학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문제는 그만두고 직접 가장 용이한 것을 골라서 날을 정하여 답변을 내도록 하였는데 명변(明辯)을 하는 자가 매우 드물었다.이 당시의 소장은 미우라고로오(三浦五郞[梧樓] 일본의 무사, 군인, 정치가. 육군중장, 자작이며 조선특명전권공사로서 명성황후시해사건을 일으킨자)이었다. 그는 나와 육군성에서 상봉하였다.

고로오(梧樓)가 말하길, 어찌 의자 시험이 어려운가, 내 부대에 있는 세 사람이 그 때문에 자살을 하였으니, 조금은 주의를 해야 할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답하길, 실제로는 그 위가 없을 만큼 쉬운 문제였고, 적어도 병을 앓은 사람이라면 의자가 아니더라도 이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후 봄가을에 시험을 보아서 출척(黜陟: 공이 없는 사람은 내쫓고 공이 있는 사람은 계급을 올려줌)할 것이다. 죽은 자는 사츠한(번)과 사번(土蕃)의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그 자살은 비웃을 만하지만 염치심이 있음을 애석할 만하다고 하여 서로 함께 웃었다.

다음해 봄에 다시 시험을 보았는데 문제는 조금 어려웠지만 답변은 꽤나 적당하였다. 비로소 시험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 나라 최초의 의사시험으로 이후 2, 3년 뒤에 의과대학에서 일반적인 의사시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병부성은 해·육군을 둘러 나누었는데 육군은 야마카타 후의 엄숙함에 의해서 크게 정돈되었다. 따라서 사가(佐賀) 번의 에토오 신페이(江藤新平: 사가 번을 존왕양이 운동에 참가 시켰고 유신후 사법경(司法卿)으로 사법제도의 확립에 노력함.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사이고오 타카모리(西鄕隆盛)에 동조하였다가 패하여 하야함. 사가 현의 난을 일으킨후 패하여 사형됨)의 반란을 토벌케 하였고 또 대만(台灣)정벌 전쟁이 있었으며, 메이지 10년(1877)에는 사이고오 타카모리(西鄕隆盛: 바쿠후 타도의 지도자로 무진전쟁(戊辰 戰爭)을 수행하였다.

유신의 삼걸중 하나로 신정부의 참의(參議)·육군대장이 되었으나, 메이지 6년1873 정한론에 관한 정변으로 하야한후 메이지 10년 서남전쟁(西南 戰爭)을 일으킨 후 패하여 시로야마(城山)에서 자살함)의 반란이 있어서 육군의 일은 이미 성취되었다. 

김강현 역 <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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