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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이전 청원 <12>
제중원 이전 청원 <12>
  • 의사신문
  • 승인 2006.11.20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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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이 제중원 이전을 청원하다

알렌이 제중원 이전을 청원하다
제중원이 문을 연 지 1년 4개월 정도 지난 1886년 8월 14일, 알렌은 조선 정부에 `공립병원 이건(移建) 확장에 대한 건의'를 제출했다.

그는 제중원 건물이 본래 민가였던데다가, 일반 주민들이 사는 곳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 여러 모로 불편한 점이 많다고 하면서, 남별궁으로 제중원을 이전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1885년 겨울에는 조선 정부가 제중원에 의학당을 부설하기로 결정하고 원 제중원 북쪽의 집을 한 채 매입하여 제중원을 확장한 바 있었다. 제중원이 문을 열 당시만 해도 알렌은 병원 건물에 대해서는 만족감을 표시했었고, 의학교 부설에 따라 제중원 부지를 확장할 때에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반년 남짓 지난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병원을 옮겨 달라는 제안을 한 것이다.

남별궁
알렌이 제중원의 새 부지로 요구한 남별궁(南別宮)은 현재의 웨스틴조선호텔과 황궁우 자리에 있던 대저택으로서, 조선 3대 국왕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와 부마 조대림(趙大臨)이 살던 집이었다. 지금 그 주변의 법정동명은 소공동(小公洞)인데, 이는 `소공주댁'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남별궁이라는 이름은 임진왜란 때 이 곳에 주둔한 이여송(李如松)을 선조가 자주 찾아가 만났기 때문에 붙은 이름인데, 그 이후로 줄곧 중국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임오군란 때에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온 오장경(吳長慶)이나 1883년 11월 각국 공사에 해당하는 총판조선상무위원으로 입국한 진수당(陳壽棠)도 남별궁에서 시무했다.

진수당이 입국했을 때는 이미 명동의 현 중국대사관 자리에 청국 상무공서가 완공되어 있었지만, 진수당은 계속해서 남별궁에 머물렀고, 청국 군인과 조달 상인들도 그 주변에 모여 살았다. 해방 이후 이 길에 수나라를 상대로 살수대첩을 거둔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이름을 따서 을지로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이같은 역사를 고려한 때문이다.

원세개와 알렌
청국인들이 조선 정부에 남별궁을 내 준 것은 1884년 7월 현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이경하의 집을 매수하여 그곳에 청상회관(淸商會館)을 지은 뒤였다.

1885년 12월에는 원세개가 진수당의 뒤를 이어 주차조선총판교섭통상사의라는 거창한 직책을 받아 부임했다. 그는 상무공서에 총리아문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마치 `총독' 처럼 행동했다. 조선 주재 각국 사절들도 그가 조선 정부와 왕실에 대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또 인정했다. 알렌이 원세개를 찾아가 만난 것은 그 해 12월 1일이었는데, 이 때 이미 원세개는 알렌과 제중원이 `자신들에게' 쓸모 있는 인물이요 기관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당장 알렌은 갑신정변 이후 부상당한 청국 병사를 다수 치료했는데, 이를 계기로 도성 도처에서 말썽을 부리다 다친 청국 병사들이 알렌의 단골 환자가 되었다. 원세개는 알렌과 첫대면한 지 불과 20일 후에 자기들이 구궁(舊宮)으로 이사할테니 제중원을 청국 상무공서 자리로 옮기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여기서 구궁(舊宮)은 아마도 남별궁(南別宮)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어렵게 되찾은 남별궁을 쉽게 내주려고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1886년 8월 알렌의 제안은 남별궁과 청국 상무공서의 위치만 바뀌는 정도의 것으로서 원세개가 처음 알렌에게 제시했던 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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