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오쿄오 와세다에 사립병원을 개원하다 <27>
토오쿄오 와세다에 사립병원을 개원하다 <27>
  • 의사신문
  • 승인 2007.10.0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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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말하길, 만일 반드시 필요하다면 사토오 타카나카(左藤尙中)가 있다. 너는 출옥한지 2, 3일 밖에 지나지 않아서, 땅도 없고 집도 없으니 2백 엔 또한 쓰임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2천 엔 가까운 저금이 있어서 다만 조금 부족할 뿐이니 결코 나를 생각하지 말고 빨리 양부모를 뵙고 안심시켜 드리거라, 너는 본래 뜻이 커서 간난(艱難)을 사양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 신중하고 요심(要心)하여, 돈을 불초(不肖:가치있게 여기지 않음)하라 하였다. 나는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하루 밤을 자고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실은 도망쳐 나올 때 1천 엔을 둘로 나누어 5백 엔은 오오지에 있는 이나리 신사(稻荷神社)의 소유승(所有僧)에게 맡겨 부모의 양료(養料)로 맡기고 또 5백 엔은 처에게 맡겨서 깊이 감추어 두라고 했기에 다시 지출할 필요는 없었다. 만일 이것을 드린다면 어머니는 반드시 남용할 우려가 있었다. 때문에 요코하마에서 얻은 것은 처에게 보관하도록 하면서 조금이라도 남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멀지 않아 와세다(早稻田: 토오쿄오도 신쥬쿠구 중북부 지명)으로 돌아왔다. 닛코(日光) 부근의 농사꾼(小百村 사람임)인 카구라(嘉藏)이란 자는 스스로 산에서 벌목하여 에도로 보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데, 병이 있으면 반드시 와서 치료를 부탁하였다.

탈주하기 전 수개월 동안 병원을 건축하고자 공사를 계획하고 사전에 그 값을 지불했기 때문에 후카가와(深川)의 목재상 아무개 씨에게 부탁하여 나의 일을 탐지(探知)하니, 목재가 이미 준비되어서 어느 곳으로 보내야 하는지를 물어왔다.

마침 다행히 와세다에서 땅을 빌려 병원을 건축하려고 하였고, 또 미리 예치한 옥와(屋瓦:이것은 막부의 배를 숨긴 집을 훼손할 때 빌려둔 물건을 예치하였던 것이다)를 가지고 반죠오(番匠: 옛날 교대로 쿄오토에 올라와 왕궁에서 일하던 목수, 大木)에게 명하여 빨리 축조에 착수할 것을 명했다.

목재, 옥와(屋瓦)는 이미 조달하였고, 요코하마에 가서 프랑스인 약물 상인에게 부탁하여 약품을 본국에서 구입할 것을 약속하였더니 병원 준공 전에 모두 수입할 수 있었다.그렇지만 침상, 기타 장식품 등을 조달하는데 금액이 부족하여 무츠(陸奧: 전 외무대신, 아직은 요코하마에 있을 때였다)에게 의논하여서 키슈우 공으로부터 이것을 얻었다.   사립병원을 열다
  이해 10월, 와세다 사립병원은 거의 낙성되었다. 우선 개원 행사를 하기 위해(아마도 우리나라의 사립병원은 이 때를 그 시초로 할 것이다.) 먼저 잔치 음식을 명하였는데, 첫째로 대학의 의학교 사람들을 초대하고자 양식 150명분을 명하였고, 기타는 일본 음식으로 하여 또한 150명분을 조리케 하였다.

3일 후 일요일 오후 1시를 기약으로 초대장을 보고 에도의 츠키지(築地: 토오쿄오도 중앙구의 지명. 긴자(銀座)에 인접한 곳. 메이지 초기에는 외국인 거류지가 있던 곳) 에 거주하는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의 의가에게도 왕림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오전 10시를 지나자 우인사상(友人士商)이 계속해서 모여들었고, 니혼바시(日本橋: 토오쿄오의 쥬오오구) 하안(河岸)의 이오 토이야(魚問屋: 고기 도매집)에서는 한 평 정도의 둥근 렌묘오다이반다이(連名大盤台) 중앙에 소나무를 심어 장식하고 그 밑에 수십 종의 물고기, 패주(貝柱: 조개관자, 음식이름), 문합(文蛤: 조개), 포(鮑: 절인 고기) 등을 산처럼 쌓아놓고 장정 6명으로 이것을 짊어지게 하여 축정(祝呈)이라고 크게 써서 기증하여 왔다. 이밖에 기증된 것으로는 안압(雁鴨) 종류 70여 마리, 과자 수십 상자, 또 우산 100개, 연합제등(連合提燈) 100여개 등으로 너무 많아서 다 알 수 없었다.

유럽인 의사들 5, 6명은 각자 마차를 몰고 왔고 배우와 예인(藝人)들 수십 인은 2, 3시 후에 도착하였으며, 대학의 의가는 그림자조차 보지 못하였고 홀로 시바에이에다(司馬盈支)가 왔을 뿐이다.

준비해둔 음식은 모두 다 먹어버렸다. 그렇지만 가지고 온 선물로 술과 안주를 보충하였으나, 마침내 밤 11시에 이르자 음식은 단지 패주를 무즙으로 버무린 카부츠(下物: 저급한 생선 술 안주 요리) 한 그릇만 내놓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다음날 내빈 수는 약 600 내지 700명이었다고 말하였다. 늦게 온 사람이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도중에 음식을 구해보려 해도 병원손님의 종복(從僕)이 모두 다투어 사버려서 군고구마, 메밀국수조차 한 입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우산은 있었지만 제등(提燈)은 1개도 남은 것이 없었다.

이것을 직접 본 자 중에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자가 적지 않다. 남작(男爵) 아카마츠(赤松) 중장(中將)은 혼자서 연설을 하였다. 도대체 대학병원 사람들은 한 명도 오지 않은 것이 가장 이상한 일로 이에 대해 물어보아도 찡그리고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아마도 대학은, 아직 병원이 아니고 단지 토오도오 댁(藤堂邸)의 구옥(舊屋)으로 그것을 충당하고 있고 내가 보-도엥 씨에게 의뢰해 가죠쿠(臥褥: 입원), 기타를 사용하여 환자를 수용할 뿐이며, 때문에 내가 출옥 후 아직도 반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행사가 있음을 기뻐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러시아 의사는 병원의 그림을 그려갔다. 프랑스 의사인 모씨는 허식이 없고 요점이 모두 완비되어 경복(敬服)할 수밖에 없다고 하며 찬성하였다.   비슈우로 가다
  이 해 11월(12월인가?) 비슈우(尾州: 아이치 현(愛知)의 서부) 공(公)이 큰 병에 걸려서 나에게 비슈우로 오라는 명령이 있었다.

내가 말하길, 개원 다음날부터 입원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 20명 정도가 되었는데, 비슈우 공(尾公)은 막부 산심판(三親藩: 에도시대의 다이묘오의 직위 토쿠가와 집안 및 일가에서 다이묘오가 된 집안으로 오와리(尾張: 비슈우의 이칭), 키이(紀伊), 미토(水戶)의 세 집안이나 이치젠마츠히라 집안(越前松平家)등등)의 제일이므로 곧바로 명령에 응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내 병원을 믿고 와서 치료를 부탁하는 사람을 버리는 것은 믿음을 잃는 가장 큰 것으로 내가 차마 못하는 바이다. 

김강현 역 <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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