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9:45 (목)
관군의 거센 압박으로 아이즈번을 떠나다 <25>
관군의 거센 압박으로 아이즈번을 떠나다 <25>
  • 의사신문
  • 승인 2007.09.12 17: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갑역(甲驛)의 의사는 소주로 씻었고 을역(乙驛)에서는 탕(湯 : 뜨거운 물)으로 또는 황백(黃柏)의 전즙(煎汁)으로 하는 등 각 역마다 하는 것이 달랐기 때문에 창구는 대개 괴저상(壞疽狀)을 보이고 환자는 매우 쇠약해 있었다. 따라서 아이즈 번주가 각 촌의를 모이게 하였고 나는 일일이 그 치료법을 말로 전해주었다.

이 소문을 듣고 오호(奧羽) 제번의 의사들은 앞다투어 와카마츠(若松)에 와서 췌(贄 : 처음으로 윗사람을 뵐 때 드리는 선물)를 드리는 자가 금세 60여 명에 이르렀다. 이름하여 ‘요이약전(療痍略傳)’이라 하였다. 오호 지역에 지금도 이 책을 소장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 닛신칸에 있는 환자는 그 수가 대체로 200명 이하를 내려가지 않았다. 그러나 와카마츠 지역은 산간지역이라 바다생선이 부족하여 자양식(滋養食)이 되는 것은 그저 계란 뿐이었다.

따라서 소를 도축하려 하였는데 노신(老臣) 등이 말하길, 조종(祖宗: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법은 소를 죽이는 것을 금한다. 법을 바꿔서는 안된다고 하였다(생각컨대 會藩의 무사로서 유망한 자는 대개 京師(=서울)에 있고 또 올 봄 아래로 후시미, 토바(鳥羽) 등에서 전사하였기에 금일 나라 안에서 함께 이야기 할 만한 사람이 적여져 버렸다). 고집스레 승낙하지 않았다. 약간 지식이 있는 자는 하위직에 있어서 일을 처리하는 권한이 없었다.

따라서 곧바로 카타모리공에게 말하길, 공은 조만간 닛신칸에 있는 부상자들을 방문했으면 한다. 그 때 소 한 두 마리를 끌고와서 쥰에게 주십시오. 나는 이것을 요리하여 자양식으로 충당하여 구래(舊來)의 수주설(守柱說)을 깨뜨리겠다고 하였다. 공은 나의 말을 매우 옳다고 하며 그 다음날 밭갈이 소 여러 마리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죽이는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탈주한 보병을 시켜 총살케 하고, 이것을 도축 조리하여 자양식으로 공급하였다.

이 일을 듣고 병이 없고 건강한 사람도 몰래 와서 그 고기를 빼앗아 가벼려, 한 마리로 한 번을 쓰기에도 부족하였다. 심지어는 전에 이것을 거절한 노신들 또한 몰래 와서 그 고기를 먹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격일로 한 마리를 도살하기로 하였다(농민들은 매우 순박하여 스스로 와서 소를 바치는 자가 적지 않았다). 소 한 마리의 가격은 3엔부터 7엔이어서, 거의 피각(皮角)의 값에 지나지 않았다. 고로 그 비용은 그리 많지 않았다.

6,7월에 이르러서는 이미 관군이 와서 사방을 에워 싸서, 다른 지방의 사람은 상인도 통행하지 못했다. 따라서 처음에 가져온 약물을 전부 다 써서 연고를 반죽하는데 재료가 없었으며 붕대 목면도 모자랐다. 따라서 철사(撤絲) 대용으로 대개 마저사를 사용했고 붕대는 번사(藩士 : 번의 무라이)의 남녀가 허리띠를 풀러 그 심을 사용하였다. 그것 역시 바닥날 것을 우려하여 날마다 세탁하게 하였지만 매우 불결하여, 참상이 실로 극에 달했다. 그러나 환자의 사망 수를 계산했는데 10명중 1.2∼1.3명에 지나지 않았다.

관군이 사방으로 압박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유지해가면서 이길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번사는 장교끼리 공을 다투어 질투가 심하였고, 때문에 세력이 일치되지 않아서, 완전하게 계획이 실행될 수 없었다.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부터 아이즈 번사는 유년부터 학교에서 문무의 가르침을 받아서 노신부터 경졸(輕卒)에 이르기 까지 모든 백중(伯仲)의 재주가 있었지만, 사상이 편협하고 각자 그 공을 탐하면서부터 일치하지 못했고, 이때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국가를 유지할 전망이 없었다. 그러나 용맹스럽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일반이 모두 같았다. 아쉽게도 철부(轍쯚 : 학철부어의 준말)를 고어(枯魚)의 시장에서 찾는 한탄이 있을 뿐이었다(찾고자 하는 대상을 적절하지 않은 장소에서 찾는 우둔함).

아이즈의 센다이(仙台) 령에 접하는 지역에 이시 무시로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센다이 병사들 대부분은 이 곳을 지켰다. 그러나 그 근방의 성을 잃고 있어서 포성이 난발하였다. 센다이 병은 겁을 내어 이를 듣고 아직 적병을 보지도 않았으나 이내 달아났다(관군은 센다이를 보고 동고리라고 불렀다. 포성 한 발에 도망가는 것이 5리라 하였다). 관군은 이것을 기회로 전진하여 와카마츠(若松) 성을 압박하려 하였다. 따라서 와카마츠성은 나날이 위태해져 갔다.

카타모리 공은 부하를 시켜 나를 곁에 오라고 하여 말하길, 요즈음 우리 번을 위해 진력한 것에 대해 어떻게 사례해야 할 지 모르겠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러, 어찌 할 수 없게 되었다. 바라건대 뜻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난하라고 하였다.

이어서 기념으로 小刀一口를 주었다(刀는 코오로 뉴도오(五郞入道) 마사무네(正宗)의 작품으로 白鮫革丙에 고토오 유우죠오(後藤祐乘)이 勒革丙과 箭을 조각한 金目貫을 장식하고 초는 葵紀章 여러 개를 시금(금은 가루로 칠기표면에 무늬를 놓은 일본 특유의 미술공예)로 하였다. 코즈카 코오가이 또한 目貫과 같았다. 후에 요코하마에서 이것을 생부 사토오 타이젠 선생에게 헌상하였다). 또 `원인목계필수장원(元人牧溪筆手長猿)'이라고 쓴 족자 한 축(軸)을 하사하였다.

내가 아이즈를 떠날 때가 임박해서 쇼코(庄內)의 신(臣)으로 아이즈에 있던 자인 혼마 유노스케(本間友之助) 등이 모두 동행을 부탁했다. 에도에서부터 함께 온 자들과 함께 와카마츠를 떠나서 코메자와(米澤)에 이르러 숙박했다. 코메자와 번 우에스기(上杉) 씨가 부하를 시켜 말하길, 사태가 지금에 이르러선 시비를 가릴 수 없다. 바라건대 우리 번에 머물러 양학과 의학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미 쇼코번에 약속한 바가 있어서 이것을 사양하였는데, 사자는 재삼 왕복하며 나중에 말하길, 만일 우리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병력으로 억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부탁을 멈추지 않았다. 만일 정 그렇다면 일행 중 유망한 사람을 대리로 머물게 하라고 하였다. 나는 역시나 대답하지 않았는데 미우라(三浦煥), 와타나베 코오키(渡邊洪基) 두 사람이 스스로 머물 것을 청하였다. 따라서 본의 아니게 그 뜻에 맡겨 두 사람을 머물게 하고 그 다음 날 아침 코메자와를 떠나서 쇼코로 향했다. 츠루오카(鶴岡)에 이르러서 의관 수 명이 와서 환영하며 여관에 들기를 청하였다.

성주 사카이 사에몬에(酒井左衛門尉)는 부유하고 병력이 충분했다. 그 접대가 매우 정중하고 음식, 침구 등 최고의 대접을 하였다. 와카마츠에서 조식(粗食)한 이래 산해진미를 만나니, 하나도 맛없는 것이 없어서 일행은 지옥을 나와 극락에 들어온 기분이 든다고 하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

김강현 역 <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