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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로 몰려온 부상병 치료에 힘쓰다 <23>
에도로 몰려온 부상병 치료에 힘쓰다 <23>
  • 의사신문
  • 승인 2007.08.30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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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자에몬 등은 마치 암흑계에서 나와서 태양을 보는 느낌이어서 그 기쁨은 가히 알 만했다. 명령을 수행한 자가 돌아가다가 나의 집에 들러서 크게 감사하고 갔다. 나는 이 때 또 다시 그 관할 하의 사람에게 가르쳐서, 나이 16세부터 60세에 이르는 자들로부터 세금으로 1년에 1엔을 받아서 국가 용도에 보태고 아무쪼록 단자에몬 부자 및 도신(徒臣) 6명과 같이 에타의 칭호를 없애줄 것을 청하는 원서를 내려고 하였지만, 이 때 이미 관군이 동하(東下)한다는 풍문이 있고, 다사(多事)한 판국이어서 잠시 중지되었다.

유신 후에는 신평민(新平民:메이지 4년 1871년, 태정관 포고(布告)에 의하여, 지금까지의 천민에서 평민으로 편입된 사람들에 대한 또 새로운 차별적 호칭) 영이 있었다. 그렇지만 관습이 오래되어서 하루아침에 이것이 고쳐지지 않아서, 오늘 이미 30여 년이 지났어도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인외(人外)처럼 생각하고 있다. 정부에는 이로움이 없고 그 백성 또한 특별히 은혜를 감사해 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일의 전말은 지금도 여전히 단자에몬의 집 기록에 남아 있다고 한다.

요도·후시미의 부상병에 에도로 오다 淀(요도 : 쿄오토오 후시미구 남서부의 지명) 伏見(후시미)의 패잔병은 대부분 키슈우(紀洲)로 도망갔다. 그 부상병이 치료를 위해 항해하여 에도에 왔다는 보고가 있었으나 그 수를 알지 못했다. 와카도시요리(若年寄:에도 막부의 직명중 하나)인 히라오카(平岡) 아무개는 나를 불러서 말하길, 후시미에서 부상병이 계속 에도로 온다는 보고가 있으니 마땅히 미리 제후의 저택으로 임시병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말하길, 이미 서양의학교로 여기에 충당하고 만일 충분하지 않으면 한의학교에 명령해야 할 것이다. 생각하건대 부상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이미 키슈우로 들어가 일단 치료를 받고 다시 해로를 통해서 에도로 온다고 들었다. 그러나 중상자는 죽었을 것이다. 만일 전쟁터에서 즉사하는 자가 백을 헤아릴 정도가 아니면 패군은 아닐 것이다. 대개는 백 명 이하가 될 것이다. 그러면 두 의학교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전에 사츠테이(薩邸)의 적을 격퇴할 때 부상자의 태반은 나의 의학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그때도 100명이 안 되었다. 그렇다면 그 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다시 말하길, 창상치료를 하는데 있어서 한방의사는 출혈을 멈추는 방법조차 모르는데 하물며 총상 요법에 있어서랴. 내가 먼저 이 치료를 교수하면 모름지기 그에 대해 배우도록 엄명을 내려라. 원래 막부의 의관은 장군의 하타시타에 속하는 자이기에 군의라고 칭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같은 치료법은 모두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의 있는 자가 있으면, 엄벌하여 그 녹을 깎아도 좋을 것이다. 모름지기 지금을 호기로 삼아 한의는 단호히 서양의방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수일 후 부상자는 계속해서 왔다. 그 중 경상자는 한의학교에 보내고, 나는 날마다 이들을 진찰, 치료하였다. 한의의 장년배(壯年輩)는 몇몇이 와서 총상을 씻고 붕대 감는 일을 하였다. 이때가 되어서 한의학교는 자연 사라져 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월이 되어요시노부 공은 우에노(上野 : 토오쿄오 타이토오구(台東區) 서부 지역. 칸에이지(寬永寺)·우에노 공원(上野公園)이 있음)에 들어가 근신하고 대성(大城)은 관군에게 넘어갔다. 요시노부 공이 공손 근신한 것이야 본래 대의명분을 중시해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유 하나는 에도의 수백만 생령을 가엾게 여겼기 때문임은 말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공이 여전히 분격하여 한번 몸소 군휘 軍摩 : 대장 旗)를 잡고 병력을 일으키면, 에도는 곧바로 초토화되어 무사시노(武藏野 : 토오쿄오의 중부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옛날에는 목초지임. 에도시대부터 농업지역으로 개발되어 잡목 숲이 있는 독특한 풍경이 유명함)의 옛날로 돌아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京坂(=교오토오와 오오사카)의 땅 또한 쇠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그 밑에 있던 인민은 온 나라와 함께 영원토록 그 넓은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양 두 학교는 부상병들의 병원이 되어 나의 관할 안에 있었기에 전부터 나를 적대시하는 한의학교는 쇠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즈음 한의가 쓸모 없음을 명시하고 전부 양의방으로 고칠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하여 오로지 부상자의 치료에만 종사하였고, 실제로 그 공을 거두는데 힘썼다.

이 때 환자의 마카나이카타(賄方:에도 바쿠의 관직으로 식사를 준비 제공하는 사람)은 탄(彈)이 명하도록 하였다(대학병원은 근래까지도 탄이 식사 제공자였는데 지금은 그 유래를 아는 자는 없을 것이다). 머지않아 관군이 동하(東下)하여 에도에 들어온다는 보고가 있었다. 따라서 폭거가 있을 것을 우려하여 환자(이때 대부분은 치료가 끝나서 남은 사람은 30여 명쯤 되었다)를 아사쿠사(淺草), 콘고마치(今戶町)에 있는 쇼오후쿠지(稱福寺)로 이송했다. 나 또한 편의상 가족을 데리고 같은 곳의 하치만 구우 샤시(八幡宮社司 : 하치만진(八幡神)을 모시는 신사의 주지)의 집에 기거하며, 날마다 쇼오후쿠지에 있는 환자를 진료하였다.

이때 관군이라 칭하고 시중을 배회하며 폭력으로 위협하는 자는 대부분 츄우코쿠(中國:일본의 중부지역), 니시코쿠(西國 : 일본의 서부 지역)의 광폭한(狂暴漢)으로서 곧잘 칼을 빼어 사람을 협박하는 것이 완동(頑童)의 악희(惡?)와 같았는데, 실제로는 겁쟁이였던 것 같다. 내가 관할하는 병실에 난입한 일은 없어서 각별히 개의치 않았는데, 이미 환자도 차례로 회복되어,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자도 있었고(집이 먼 환자에게는 여비를 지급하였다) 잔류하는 자는 겨우 도창(刀槍)의 부상자 두 명 뿐이었다.

동주 (東走)   관군의 선봉이 점점 들어오고 있었지만, 아직 대장(大將)의 입부(立府)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 후 1개월 만에 우리 육군의 프랑스 전습병이 조금씩 탈주하기 시작했다. 대개는 닛코(日光) 가도(街道)로 나간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우두머리 격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장년(壯年)의 기예있는 사람으로 거의 오합의 무리였다. 드디어 오오토리 케이스케(大烏圭介 : 1833~1911년 에도 말기 메이지 초기의 정치가. 효고현 출신 오가타 코오안(緖方洪庵)·에가와 에이류우(江川英龍)등에게 난학과 병학을 배움. 청국·조선공사로서 청일전쟁 전후의 외교공작을 담당함)가 이에 참여하였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그 지위가 낮은데 위령(威令)이 행하여질지 걱정스럽다. 

김강현 역 <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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