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노부공에게 단자에몬 추명제거를 청하다 <22>
요시노부공에게 단자에몬 추명제거를 청하다 <22>
  • 의사신문
  • 승인 2007.08.23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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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자에몬은 후에 아시카와(足利) 때에 소송이 있었고 이에 이겨서, 막하(幕下)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사령서(辭令書)가 있었다. 제1대 쇼오군인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세이가 하라 전쟁에 따라가서 전공을 세워서 감사장을 하사받았다. 제3대 쇼군인 토쿠가와 이에미(三代將軍)이 닛코(日光 : 제1대 쇼오군의 사당인 도쇼오궁이 있는 곳)신사를 참배할 때 우츠노 미야(宇都宮)에서 하사하였다. 그 배하(配下) 자로 하여금 간첩을 하게 하여 제번(諸藩)의 국정을 탐정함으로써 이름을 하사받고, 탄지키키(彈直記)라고 했다.

이 때 이미 28직(職)의 장(長)이 될 수 없어, 새삼스레 히닌(非人 : 사농공상 밑에 속하는 천민으로 유예나 형장의 잡역에 종사하거나 남의 집 앞에서 기예를 하여 돈을 구걸하는 자), 고오무네(乞胸:일본 고유의 가면 음악극인 능악(能樂)을 하는 배우, 배우(俳優) 이하 유운(遊芸)을 가지고 생계를 유지함), 기도(木戶 : 문지기를 두고서 돈을 받는 자), 사루히키(猿引 : 원숭이를 시켜 재주를 부리게 하고 돈을 버는 사람) 등 세 직업의 장이 되었다. 또 유녀(遊女), 운기(芸妓) 이른바 케이세이야(傾城屋 : 여색을 파는 집) 등은 28직(職) 아래로, 인륜외(人倫外)로 해야 한다는 명령서도 있었는데 현재 그의 집에 보존되어 있다. 케이세이야은 여덟 가지 덕을 망각한 사람으로 인륜외라 하여 비하되었다.

제 5대 쇼오군인 토쿠가와 츠나요시때 처음으로 단자에몬을 에타(穢多)라 하여 멸시하였다. 그렇지만 전에 결정된 법을 변경할 수 없었기에 여전히 그 이름을 버리지 못했다. 요시와라(吉原)같은 이는 정월 원단에 단자에몬 배하의 천한 자들이 오오부타이(大黑舞)를 공연하는 것을 기다려서 그 문을 여는 것을 상례(常例)로 하였다. 배우 이치카와 단쥬우로오(市川 團十郞), 오노에 키쿠고로오(尾上 菊五郞)는 극장좌주(劇場座主) 모리타 칸야(守田 勘彌)와 같이 하나시카(라쿠고를 하는 연예인), 샤미센히키(三味線引;샤미센 현악기를 연주하는 예인), 타유우(太夫)의 부류로 모두 예인(芸人)으로서 기명(記名) 날인하는 장부가 있었다. 지금도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다치바나 운슈우(立花雲州 : 다치바나 이즈모의 별칭)에게 부탁하여 그의 가신으로 요로에 있는 자를 동반하여 단자에몬(彈)의 집을 방문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그의 집에 전해오는 고문서를 한 번 보려고 하는 것이다. 때마침 콘도오 이사미는 총창(銃創)을 입어서 치료를 위해 나의 집에 기거했다. 저녁 때 함께 단자에몬의 집에 가서 고문서를 일람하고 그 추명을 제거할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단자에몬(彈)이 말하길, 종전부터 막부의 간리(奸吏) 등은 추명을 없애준다는 명분으로 황금을 탈취하려 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고, 모두 그것을 좋은 기회로 여겨서 속이려고 했다고 하였다.

나는 웃으며 말하길, 나는 단지 한 조각의 의심(義心)으로 당신의 가문을 위해 의논하려 한다. 어찌 황금이 필요할 것인가? 너는 결코 마음을 애태우지 말라고 하였다. 이사미도 곁에서 나의 사람됨을 말하면서 의구심을 없애려 하였다.

나는 거듭해서 말하길, 지금 에타라고 말하는 추명을 제거하는 것은 가능한데, 그 이후에는 종래 소유의 전원(田園)에는 반드시 조세를 부과할 것이다. 추명이 제거되고 가계가 쇠하면 무엇이겠는가. 그 때가 되어서 나를 원망하지 말라. 나 또한 너의 가문을 위해서 계획한 한 가지 방책이 있다. 그것은 천천히 말하기로 하고 동반한 사람과 같이 돌아왔다.

이후 죠오(讓)와 교제하는 것이 점점 깊어져서 이후를 계획하는 것 또한 밀접해졌다. 말하길, 종래 유명무실해진 히닌, 고오무네, 사루히키, 케이세이야 등의 관할을 다시 공임(公任)으로 하고, 또한 토오카이(東海), 토오산(東山), 호쿠리쿠(北陸) 제도(諸道)의 역기(驛妓)에 대하여 매독 검사를 행하기 위해 인두세를 부과하고, 이것을 관리하여 그 세금에서 실제 비용을 제외하고, 잉여금은 수수료라 하여 수입으로 하는 것은 어떠하냐고 하였다.

죠오는 이견이 없이 이것에 동의하였고, 원서를 만들게 하여 이것을 카쿠로오 타치바나(立花)에게 보냈다. 그러나 제 유사(諸 有司)는 매우 냉담하였고 이를 논의하지 않았다. 방치되어 세월이 덧없이 흘렀다. 타치바나는 로오쥬우라고 하지만 말석인지라 감히 이것을 극론(極論)할 권한이 없어 매우 분개하며 참지 못하였다.

정유년 겨울, 요시노부 공은 쿄오토오에 있었는데 대정(大政)을 반상(返上)하고(타이세이 호칸(大政奉還 : 1867년 토쿠가와 바쿠후가 정권을 메이지 천황에게 반환함), 하타 시타(旗下)의 무사들에게서 조폭(粗暴)의 거동이 있을 것을 우려하여 오오사카로 퇴거하였다. 몰래 쿄오토오의 상황을 살펴보았는데, 무진년 정월에 이르러 다시 상경해야 한다는 명령이 있었다.

행장을 갖추고 상경하려고 하는데 선발의 무사가 야마자키(山崎)에 이르자 관문을 폐쇄하여 통행을 허락하지 않아서,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츠마의 무사인 노즈 카시이치(野津嘉七)은 뜻을 정하고 대포를 발사케 했더니 타키가와 아무개(하리마(播磨) 슈, 대감찰)는 창황히 오오사카으로 도망갔다. 그 겁 많고 나약함이 한탄할 만하다. 또 아이즈 번(會津藩)의 한 부대가 후시미(伏見)에 있었는데 허둥지둥대며 병력을 내었지만 그 전쟁의 발단이 무엇에 의해 시작됐는지 몰랐고, 때문에 진군에 책략이 없었다. 하타시타의 병사는 평소의 언변과는 달리, 그저 앞을 다투며 도망쳐서, 계속해서 오오사카에 집합했다. 요시노부 공에게 곧바로 귀부할 것을 상신하였다. 공은 본래 신하는 족히 믿을 바가 못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곧바로 군함에 태워서 귀부시켰다. 에도에 있는 자는 이것을 듣고 무슨 일 때문인지를 몰라서 크게 당황하기만 하였다.

나는 곧바로 등성(登城)하여 공을 알현하였다. 그 때에 공은 혼자서 깊게 심로(心勞)하는 불안한 상태였다. 나는 몰래 올릴 말씀이 있다고 아뢰니 공은 곧바로 판연(板椽)에 나아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단자에몬의 추명 제거의 일을 청하니 공이 말하길, 쿄오토오에 있는 동안에 많은 일이 있어서 이것을 재판할 시간이 없었다. 지체되어 오늘에 이른 것은 결코 태만한 것은 아니다. 원서(願書)는 지금 누구의 수중에 있느냐 라고 물었다.

나는 타치바나 이즈모(立花出雲)이 관여한다고 대답하였더니 곧바로 이즈모(出雲 : 시마네현의 동부 ) 슈를 불러서 내일 이것을 허가하도록 명령하였다. 곧 마치 부교오 카와치(河內)슈가 단자에몬 부자(父子)를 소환하여서 단자에몬 및 그 신하로 카마쿠라(鎌倉) 이래로 종사해온 6명에게 모두 에타의 칭호를 없애고 사적(士籍)에 올리도록 하는 명을 전달하였다.

김강현 역 <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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