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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 <1>
행복한 사람 <1>
  • 의사신문
  • 승인 2006.10.2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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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 해 전, 그날도 이번 여름처럼 몹시 무덥던 오후였다. 진료를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던 참에 중년의 여인이 왕진을 요청하였다. 남루한 옷차림에 지친 표정이었다. 애원에 가까웠다. 이곳에 오기 전 몇 군데 병원에서 거절을 당한 것 같았다. 나는 저녁 약속이 있었지만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어 따라갔다. 도시의 개원의로서 특히 비뇨기과의사로서 왕진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택시에서 내려서 좁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 어느 다 쓰러져 가는 집으로 들어갔다. 말기 암으로 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어 퇴원한 중년의 남자가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두려움과 염려의 눈을 하고 나를 맞았다.

소변을 보지 못하여 요도 카테타(foley)를 한 상태로 퇴원하였는데 그것이 막혀서 방광이 차고 힘들어서 나를 부른 것이었다. 카테타를 갈아 주었다. 암은 전신에 퍼져 있었고 욕창도 심해 살아 있었지만 내가 볼 때 환자의 남은 삶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냥 나오기가 아쉬워 같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 기억나지는 않지만 “보이는 세상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세상이 있고 그곳에는 고통과 눈물이 없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인 것으로 기억된다.

환자와 아내의 눈이 순간 반짝 빛났다. 두려움과 절망의 표정이 사라진 듯 보였다. 한사코 사양하는 나에게 봉투를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어려운 형편에 적지 않은 돈이었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여러 가지 상념에 잠겼다. 그 환자분은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혼과 불륜과 미움이 가득한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자신을 사랑하는 아내가 옆을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인생이란 느낌이 들었다. 가난 속에서 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남편을 헌신적으로 간호하는 아내, 마지막까지 자신의 모든 것으로 배우자를 섬기는 것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가슴에 저려오는 것이 있었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고향의 나무와 개울과 바람과 별들이 지나갔다. 차는 산동네를 빠져 나와 시내로 들어섰다. 거리는 다시 네온의 불빛과 사람들의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갑자기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이었다. 방금 있었던 애절한 기억이 까마득한 옛일처럼 지나갔다. “그래, 나는 가난하지도 않고 몸은 건강해. 나는 그곳 사람이 아니야.”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포장마차에 들러 오랜만에 폭음을 했다. 그러면서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는데, 그 눈물이 내 이기적인 자아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었는지 다시 세상에 빠져 들어가는 내 연약함 때문이었는지 이제는 사라진 고향의 그리움 때문이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이주성 <인천 이주성비뇨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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