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부정권 말기, 혼란과 대립의 연속 <17>
막부정권 말기, 혼란과 대립의 연속 <17>
  • 의사신문
  • 승인 2007.07.05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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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인의 육해군이 정예하고 규율이 엄숙하며 장병 각자는 그 제도에 복종한다. 해마다 다른 나라와 교전하지 않음이 없어 병기가 예리하게 되었다. 지금 일반적으로 서양이라고 해도 그 중에 큰 나라는 4∼5개국, 작은 나라는 6∼7개국으로 상대국과 대치하고 경계를 접하여 서로 그 틈을 엿보고 있다, 12∼13개국의 합종 연횡은 거의 쉼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서 인도지방을 침략하고 역시 지나(支那)를 침범한 지도 수십 년에 이른다, 그런데 그 토지를 뺏지는 않고 단지 그 이익을 거두기만 한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서양 각국은 땅이 메마르고 전지(田地)가 풍족하지 않고 기후가 불량하여 산물이 적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영국 같은 나라는 그 인구와 생산물을 비교하면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음식물이 충분하지 못했다, 이것을 우려한 끝에 마침내 큰 제조장을 만들어 인도, 아프리카로 항해하여 면화를 많이 구입해와서 왕성하게 면포를 제조하여 얻는 이익을 가지고 식량을 구입하여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병력을 충분히 하여 대군함을 이끌고 각국을 침략하려고 하였다, 싸움에서 이기면 그 군비를 배상받았다, 증기선을 발명했다는 것은 내가 12세 무렵에 들은 적이 있는데 당시 화란 왕이 막부에 헌상했다고 하였던가? 당신에게 부탁하건대 허심평기(虛心平氣)하게 천하의 대세에 주목하여 크게 생각하여야 한다고 했다.



콘도오 이사미에게 세계정세 설명

곧 지도와 전쟁의 그림 및 기계도 등을 보이고 이것을 설명하였더니 이사미가 크게 기뻐서 오늘 당신 설명에 의해 나의 수년간의 의문 덩어리가 얼음 녹듯 확 풀렸다, 가르쳐주신 것을 잘 가지고 돌아간다. 3일 후에 다시 와서 웃으며 말하길, 이번에는 정말로 병이 나서 진찰을 부탁한다고 하였다. 이에 진찰을 하는데 음식 불량으로 인해 위가 손상되었다. 따라서 건위제산하제(健胃制酸下劑)를 투여했다. 그가 말하길, 내일 보오죠오(坊城) 씨를 호위하여 경사(京師)로 돌아가게 되었다, 또 가까운 시일에 장군 가의 상락이 있을 것이다, 그 때 만일 수행할 경우에 경사에서 배알 할 것을 약속하고 갔다.  

당시 제번의 사 중에 시사(時事)를 개탄하고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설을 주장하는 자가 일어나고, 그 설에 부화뇌동하는 자가 점점 많이 늘어나서 결국은 좌막(佐幕: 막부를 돕자는 설 : 존왕양이에 대립하는 좌막개국주의(佐幕開國主義))이라고 하고 도막(倒幕 : 막부 타도)이라고 칭하여 분쟁이 거의 세상의 안녕을 파괴하려 했다.  

그러나 당로자는 대개 능력도 없이 관위에 있으면서 녹을 받고 있어서 누구도 담력을 가지고 미력이나마 일조하여 기울어진 형세를 만회하려는 자가 없었다. 헛되이 위계의 고하를 가지고서 마치 지식의 깊이가 있는 것처럼 보았고, 정각(定刻)을 알리는 북소리를 듣고서 성중에 출입하여 인순고식(因循姑息) 광음도소(光陰徒消: 이제까지의 방법을 답습하고 일시적인 안일을 구하며, 구습을 따를 뿐 고치려고 하지 않고 세월만 낭비함)만 하였다.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었다.

  태평이 오래되고 사(士)로서 군(君)을 받드는 것을 잊는 자는 없었지만 필경 지혜 없고 용기 없이 그저 영불자의 자비심 같은 부인(婦人)의 인(仁)만이 있을 뿐이었다. 사람은 나무토막이나 흙인형 같아서 유위(有爲)한 자가 없었다. 쵸오슈우(長州)의 사람이 경사)를 압박하고 금궐을 범하려 하자 막의(幕議)는 이것을 조적(朝敵: 조정의 적)으로 보고 장군이 몸소 출정할 것을 결정하였다.  

나도 또한 종군했다. 곧 길을 토오카이도오(東海道)로 잡아서 순뿌(駿府 : 현재의 시즈오카)와 나고야(名古屋)에 머물기를 수일, 히코네(彦根;시가현과 히와호 주변을 말함)를 거쳐서 곧바로 서하(西下)하려고 했다. 당시 칙사(勅使)가 있어서 입궐해야 한다는 명을 전달했다. 따라서 후시미(伏見)에서 길을 돌려서 입경(入京)하였다. 처음 장군이 친정(親征)의 결의를 하자 전쟁의 일은 겐와(元和: 1615∼1623) 이래로 절무(絶無)하여서 여러 유사는 행군의 일을 의논하여 하타시타(旗下)의 사에게는 도중 숙박의 여점(旅店)을 나눠주었다. 사는 대개 침구를 가지고 왔고 식기도 각자 휴대하여 갔다.

이처럼 환고(귀족이나 부자의 자식을 가리킴) 무리들은 스스로 신발도 묶을 줄 몰랐다. 옛날 마카와(三河: 미카와쿠니의 출신인 마츠타이라 제8대 당주. 히로타다의 적자로 태어난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고향을 말함) 어가풍(주군의 풍모) 무사의 풍모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고 그 우둔, 그 나태는 극히 개탄스러워서 포복절도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쇼오군 가에서는 어가풍(御家風;주군으로서의 풍모)임에도 간이(簡易)를 주로 하여 오히려 신하들과 같지 않았다.  

신센쿠미 치료

  막부말에 에도(동경)에 나타난 미국함대에 의한 일본의 개항으로 시작하여 좌막파와 유신파의 대두 등 일본은 일순간에 혼란에 빠지게 된다. 특히 좌막파와 유신파가 대립하고 있던 교토에는 수많은 탈번무사들이 사흘이 멀다하고 살인을 자행하여 교토의 분위기는 날로 뒤숭숭해져 간다.

  이에 교토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낭사를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당시 에도에서 죽도검술보다는 실전검술을 중시하던 검술도장 시위관(試衛館)을 운영하던 천연이심류의 콘도오 이사미(近藤勇), 히지카타 도시조,(土方歲三), 오키타 소오시(沖田總司), 이노우에 겐자부로 (井上源三郞) 등의 무사들이 교토로 상경, 초대국장을 세리자와 카모(芹澤鴨; 나중에 신선조 대원들에게 참살당함)로 하여 1963년 미부(壬生)라는 마을에서 신선조를 결성하었다.  

쿄오토오(京都)에 도착한 후에는 키무로마치(木室町)에 있는 남베세이이치(南部精一)(나의 문인으로 아이즈번(會津藩) 사람이다)의 임시 거처에 살았다. 미처 자리도 잡지 못했는데 콘도오 이사미가 찾아 왔다. 서로 담소하고 동시에 시세가 나날이 잘못되고 있음을 탄식하였다. 이 때 쇼오군가는 칙명으로 잠시 오오사카에 체재하였고 정토(征討) 제후(諸侯)를 지도하게 되어 금기(錦旗: 빨간 비단에 달, 해를 그린 천황의 기), 절도(節刀: 장군이 출정할 때 천황이 하사하는 칼)를 하사 받았다. 나는 하루 휴가를 얻어 이사미의 초대에 응하여 그 둔소(屯所: 경찰서)로 쓰는 니시홍간지(西本願寺;쿄오토오의 시모쿄오에 있는 정토진종 사원. 정토진종 홍간지파의본산)의 일원(一院)에 갔었는데 주효(酒肴)를 베풀어 놓고 환어(歡語)하며 시간을 보냈다.

김강현 역 <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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