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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된 의사(Civilized Doctors)를 양성하기 위한 의학교육 <37>
문명화된 의사(Civilized Doctors)를 양성하기 위한 의학교육 <37>
  • 의사신문
  • 승인 2007.07.0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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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 소양 부족 땐 의료 기술자에 그쳐

필자가 재직 중인 아주대학교 의과대학은 꽤 많은 미술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의대와 병원 곳곳에 유명 화가들의 대형 유화작품과 판화들이 걸려있고 건물 내, 외부에는 여러 점의 조각작품이 놓여 있다. 아주의대가 이렇게 많은 미술품을 소장하게 된 데에는 초대학장이었던 이성낙 교수님(현 가천의대 총장)의 소신과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독일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교수생활을 한 이 교수님은 그 곳의 의과대학들이 학생들에게 음악과 미술, 문학과 철학 등 다양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도록 요구하고 지도하는 것을 경험하였고, 아주의대를 설립하면서 우리나라 의대생들도 그러한 인문사회적 교양을 갖출 수 있도록 교육하겠다고 결심했다 한다.

그 후 이 교수님은 아주의대 학생들을 인솔하여 경주의 선재미술관, 광주비엔날레 등을 참관하고, `의학과 예술'이라는 과목을 개설하여 의대생들이 다양한 예술분야 명사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의대생들이라면 적어도 의학의 역사와 철학은 알아야 한다는 판단 하에 국내 최초로 의사학 전임교수를 임용하였다. 이때 임용된 인문사회의학교실 이종찬 교수는 현재 의학의 역사, 의료인류학, 의료사회학 등의 강의를 담당하며 개인적으로 전국의 의대생들과 교수들을 모아 `세계 의문화(醫文化) 기행'이라는 학술여행 행사를 해마다 개최하고 있다.  

역사가 짧은 신설의대인 아주의대가 설립초기부터 학생들에게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인문학 교육을 시행한 것은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사실 아주의대가 개교하던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만 하더라도 의대생들에게 문학과 예술, 역사와 철학을 교육한다는 것이 생소함의 차원을 넘어서 냉소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자연과학자가 될 학생들에게 웬 문과 교육이냐 라든가, 가뜩이나 가르쳐야 할 의학과목이 많아 허덕이는 데 한가하게 미술관 구경 다닐 시간이 어디 있느냐 등의 비판이 있었던 것이다. 의과대학에서의 인문학 교육에 대한 이러한 무관심과 냉소는 거의 전국적인 현상이어서 다른 의과대학에서도 인문학교육을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시도는 힘을 얻지 못하고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국민의 외면, 인성교육 부재서 초래

그런데 2000년도의 의약분업사태를 겪으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의사들은 그들이 올바르고 합리적인 주장을 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국민들에게 외면당하고 냉대와 질타의 대상이 되는 데 크게 당황하였고 좌절하였다. 그리고 이 외면과 질타가 대부분 의사들에 대한 국민들의 일반적 정서, 즉 의사들의 교양 없음, 경박함, 일방적이고 고압적 태도, 의사소통 능력이나 설득력의 부재 등 인성문제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자연히 의사, 의대생들에 대한 인성교양교육의 필요성, 당위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새로이 인문사회학 교과목을 신설하는 데 대한 저항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때부터 전국의 모든 대학에 여러 가지 형태의 인문사회학 과목들이 개설되기 시작하였다. 아주대학의 경우처럼 개별 교과목 형태로 개설되는 경우도 있고, 서울대학교처럼 환자-의사-사회라는 의미의 PDS(Patient-Doctor-Society) 통합과정, 혹은 Doctoring 과정으로 운영되는 학교들도 있다. 이 과정들은 그 안에 온갖 다양한 주제의 강의와 토론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공통점은 의과대학생들에게 인문학적 소양, 인성을 키워주기 위한 교육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정규교육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나 효과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적지 않다. 즉 인성이나 교양은 평생에 걸쳐 습득되는 것이지 대학교육에서 몇 시간의 강의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래서 의과대학에서의 인문학 교육은 의학의 역사나 의료인류학 등과 같은 의학과 직접 관련된 학문을 제외하면 선택과목의 형태로 운영하거나 교육의 목표를 인문학에 대한 흥미유발 정도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인문학적 소양이 정규교과목이 아닌 하루하루의 의과대학 생활 속에서 학생들에게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감추어진 교육과정(hidden curriculum)이며 이 글을 시작하며 소개했듯이 아주의대에서 많은 미술작품들을 걸어놓아 학생들에게 예술적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것도 일상생활에서 문화적 소양을 키워주려 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 밖에도 의과대학 내의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장려하고 지원하는 것, 의과대학이 속한 대학교(university)와 폭넓게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담임반 등의 제도를 이용하여 선후배간의 모임을 자주 갖도록 하는 것 등이 모두 학생들의 인성교육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방법들은 그 자체로써 인성교육의 완성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의사들이 평생에 걸쳐 조금씩 발전시켜 갈 교양의 핵을 심어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 의학 완성위한 필수요소

최근에는 인접 공학 분야에서도 학생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지고 있다. 미국 국립엔지니어링 협회 이사장을 역임한 Samuel C. Florman는 그의 저서 `교양있는 엔지니어(civilized engineer)'에서 현대의 엔지니어들은 과거에 비해 팀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리더십, 비공학 전공자들에게 과학기술을 설명하고 이해, 설득시킬 수 있는 의사소통능력, 그 어떤 나라에 가서 근무하더라도 문화적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문화인류학적 배경지식, 그리고 자기규제의 정신, 고도의 윤리도덕관 등이 요구되지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로 가고 있다고 우려하였다. 즉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인하여 공과대학생들이 4년간 배워야 할 지식의 양이 너무나 늘어났고 따라서 인문교양교육을 희생시켜서 기술교육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공과대학은 최신의 공학지식이나 기술로 무장은 되어있지만 실제 현장에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능력은 떨어지는 단순한 공학기술자를 양산해내는 직업기술학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늘날 공과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과거의 선배들에 비해 안정된 직업, 빠른 출세, 스톡옵션 기회, 화려한 파티들을 훨씬 더 동경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기업의 CEO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인문계 출신의 절반에 불과하다.

그 이유를 Florman은 공대졸업생들의 인문학적 소양부족에서 찾고 있다. 공과대학을 갓 졸업하고 현장에 투입된 젊은 엔지니어들은 학생때 기술관련 과목을 좀 더 깊이 공부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만 졸업 후 10년쯤 지나면 경영학이나 경제학을 배우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하지만 다시 10년쯤 흘러 40대가 되면 비로소 학생 때 리더십이나 문학, 역사, 철학을 등한시 한 것을 후회하며 그때는 이미 많은 것을 잃고 만 상태라고 한다. Florman은 인문학적 소양이 출세의 수단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되지만, 인문학적 소양없이는 출세가 매우 어려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공학교육자들의 이와 같은 인식은 그대로 의학교육에 적용해도 전혀 틀리지 않는 것들이다.  

Georgetown 대학의 내과 및 의학윤리 교수인 Edward Pellegrino 교수는 “의학이 과학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과학이며, 예술 중 가장 실증적 예술이고, 인문학중 가장 과학적인 인문학(“Medicine is the most humane of sciences, the most empiric of arts, and the most scientific of humanities.”)“이라고 말한바 있다. 의학은 자연과학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모든 학문과 예술이 수렴된 형태이다. 같은 맥락에서 의사는 단순한 의료기술자, 기계공학적 의학을 하는 엔지니어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미래의 의사들은 지금보다 훨씬 문화적 소양, 인문학적 교양을 갖춘 문명화 된 의사(civilzed doctors)가 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 의학교육은 좀 더 많은 시간을 인문학 교육에 투자해야 할 것이다. 인문학은 의학의 장식품이 아니라 의학을 완성하기 위한 필수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임기영 <아주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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