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부 붕괴로 구매법 시행의 꿈 좌절 <15>
막부 붕괴로 구매법 시행의 꿈 좌절 <15>
  • 의사신문
  • 승인 2007.07.02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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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코 가와치(石河 河內) 수는 나이 30여세로 문무에 뛰어나고 하타시타 가운데 손꼽히는 인물이다. 특히 격검(擊劍)을 잘하고 도제도 또한 많았는데 후에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어서 개국설을 주장하고 도제의 양이설을 반박했다. 때문에 분요(紛擾)를 일으켰고 분만한 나머지 할복하여서 죽었다. 진실로 안타까운 인물이었다.

서양의학소 부속 구매원정지

가와치(河內) 수도 구매의 필요를 알고 있었기에 크게 이것을 옳다고 하며 말하길, 나는 잘 보좌하여 이 일이 성취되게 할 것이다, 나도 또한 당신을 위로할 일이 하나 있다, 원래 마치부교오(町奉行:영내의 도시 즉 마치카타 의행정. 사법을 담당하는 직책) 부속의 소리(小吏)에게는 요리키(?力: 도오신과 함께 배속되어 상관을 보좌함. 경찰서장에 해당), 도오신(同心: 경찰 사무를 분담한 하급 관리)이 있고, 부교오는 종종 경질하여도 이 무리들은 세습을 하여 제멋대로 위복(威福)을 농하고 시중을 침학하고 뇌물을 탐하여 작은 녹을 받으면서도 부호도 미치지 못하는 교사(驕奢)를 이루고, 종종 장관인 부교오를 능멸하는 일이 있다, 인습이 오래되어 이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실로 분개를 참을 수 없었다, 생각하건대 지금 당신이 이 신설의 법을 시행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그들이 간섭하고 제멋대로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그들이 평소처럼 와서 하는 간사(奸事)를 탐정하여 누술하지 말고 빠짐없이 필기하여서 당로의 유력자에게 보여서, 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계획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그 탐정의 글을 가지고 속료(屬僚)를 힐책하고 이 때를 기회로 크게 연래(年來)의 숙폐(宿弊)를 일소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나는 반시치(伴七)와 마츠바야(松葉屋)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마치가타 속리의 소행을 자세하게 탐정시키고 이것을 하나의 문서로 만들어 몰래 카쿠로오 마츠마에 시마(松前志摩) 수에게 제출하였다. 이로부터 수일이 지나서 구매를 위한 유곽 신설의 건에 대하여 유사(有司)의 평의가 있었는데, 이 유곽 내에는 마치가타 속리가 함부로 간섭하지 못한다는 건에 대해서 가와치(河內) 수는 어렵게 말하길, 이곳을 나의 관할로 하여서 내가 속리의 감독을 벗어나려는 계획은 부당한 것이다, 나는 결코 이것을 허락할 수가 없다,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라고 질문했다.

당로자는 이미 나의 명으로 탐정하여 얻었던 마치카타 소리(町方小吏)의 간사를 열거한 책을 꺼내어 보여 주었다. 가와치 수는 크게 놀라면서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서 속리를 집합시켜 이것을 보였더니 그들이 모두 크게 두려워하며 감히 한 마디도 변명하는 자가 없었다.  

하주(河州)가 말하길, 지난 일은 책망하지 않겠다, 이번에 개설되는 유곽은 구매를 위해서 설치되는 것으로 서양의학소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장인 마츠모토의 신용을 얻기 위해서라도 결코 나는 속리의 간섭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각자 마땅히 이 뜻을 명심하고 결코 간여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엄중히 논하였더니 그들 모두 유유낙낙 말 한 마디도 없이 그 취지를 이해한다고 하였다.  

후에 유곽 개설이 되어서는 총문(總門) 밖에 사무소를 설치해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유곽 안에서 비상의 일이 있어 부탁하는 것이 아니면 마치카타(町方)의 관리는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구매에 관하여 의원 및 그 사무를 집행하는 자의 급료 등은 기루(妓樓)에 세금을 부과하여 조달하고 창기에게 인두세를 부과하여 이것을 의학소에 납부시켰다. 이곳에서 저 군소배는 나를 더욱 심하게 미워했다. 그렇지만 나는 상장군(上將軍)의 신용을 얻었고 또 카쿠로오의 지우(知遇: 인격이나 식견을 인정받아 후대를 받음)를 받았기에 간리(奸吏)라도 무서워서 해를 가할 수 없었다. 나는 당시 유위(有爲=有望)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얻어서 말한 것이 실행되지 않는 일이 없었고, 실행해서 이루지 못한 일이 없었다. 또 장사(壯士)가 그 번에서 뜻을 얻지 못하여 탈적(脫籍)한 자 중에는 크게 쓰일 수 있는 자가 없지 않아서, 가련(可憐)하게 여겨 도움을 준 자가 꽤 많았고 때문에 쥰의 가계는 늘 궁핍하였다. 그리하여 네즈(根津)의 땅은 유곽으로 허가를 얻어 점차 건축에 착수하여 창루 대소 11가에 이르렀다. 총문 앞에 척각일장여(尺角一丈余;단면이 1척, 약30.3cm 사각의 목재로 1장(10尺)의 길이임)의 봉항(棒杭)을 세워서 `서양의학소 부속 구매원정지(驅梅院町地)'라고 크게 썼다.  

이것을 단서로 하여 마침내 정돈되려고 할 때 원통하게도 시세가 변하여 나는 동오(東奧)로 몸을 피하고, 막부는 드디어 무너졌으며 구매법은 시행되지 못하고 헛되이 화류가(花柳街)만 하나 더 늘리게 된 셈이었다. 이 방시항(榜示杭)은 메이지 4∼5년 무렵까지 존재하여 나도 본 적이 있다고 생각된다. 당시엔 구매법이 시행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그 법이 아직 완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오늘날 검매(檢梅)로 인해서 유곽의 창기는 매독을 줄였지만 유곽 바깥에서 몰래 매음 하는 자가 있어서 그 독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것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한다. 당로자는 경계를 더 철저하게 법을 설치하여 이 무리들도 검사해야만 한다. 매독을 경계하지 않는 것은 방화의 금 이 없는 것보다 더 심하다. 불은 단지 재산을 잃게 하는데 그치지만 매독의 전파는 끝이 없어 자자손손(子子孫孫)에 전파되고, 모든 종류의 난병(難病)이 되어 마침내 사람을 죽이고 국력을 약하게 한다. 적절한 방법으로 이것을 방알하는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한의학교와의 교류

바쿠후의 의사는 2천석의 세록을 누리는 자를 최상으로 하고 5인 후지(扶持: 주군이 가신에게 주는 봉록. 일인 일일 현미 5홉을 기준으로하여 이 일년분을 쌀 또는 또는 금으로 주었다)를 최하로 한다. 쿄오호(享保 1716∼1735) 무렵 의사의 보통 녹봉은 2백석을 세습하도록 하고 의술로 봉직하는 자는 반드시 그 급료를 증가하고 또 각 택지를 하사하였고, 게다가 그 외에 정지(町地)도 줌으로써 적빈(赤貧)에 이르는 자는 드물었다고 한다.

  의가의 수는 최상부터 최하에 이르기까지 모두 합해 400가이고 봉급·은록급(恩祿給)하는 지대 등을 합산하면 약 25만석 밑으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그러나 박급자(薄給者)는 다소의 학술이 있어서(한방의다) 병가에 알랑거려서 약을 팔아 가계를 도왔다. 500석 이상의 자에 이르러서는 책을 읽고 글을 아는 것이 거의 유자(儒者)라고 할 만하였다. 그렇지만 의술을 하는 것을 아는 자는 없었다. 만일 그 집에 아픈 사람이 있다면 대개 다른 의사를 초빙하여 치료를 받는 것이 상례였다. 부유함이 사람에게 독이 됨을 알겠다. 따라서 이 폐해를 일소하려고 하여도 계획이 적절하지 못하면 노력해도 효과가 없었다. 잠시 좋은 기회를 기다려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더 나았다.

김강현 역 <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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