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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실제상황에서의 성찰적 실천이 강조되어야 한다 <34>
복잡한 실제상황에서의 성찰적 실천이 강조되어야 한다 <34>
  • 의사신문
  • 승인 2007.06.15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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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학습 통해 '행위속의 성찰' 육성해야

의학은 경이로운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의사들의 자신감은 오히려 저하되고 의료전문직의 행위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더욱 심화되어 가고 있다. 의학이 발전하면 그만큼 의사의 자신감도 늘어나고 의학 및 의사에 대한 사회의 신뢰도 높아져야 할 터이지만 막상 눈앞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의학이 손 기술(技術)을 탈피하고 과학의 반열에 오른 것은 의학이 대학의 학문으로 편입된 19세기말∼20세기 초의 일이다. 19세기말 미국의과대학협회의 문서는 당시의 의사양성기관들을 `터키탕이나 이발소와 다를 것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참담한 상황이 기초의학 2년, 임상의학 2년의 대학식 교육과정으로 바뀌게 된 것은 몇몇 선진적인 의학교육자들의 노력과 때맞춰 시의 적절하게 등장한 플렉스너 보고서의 덕분이다. 이때부터 의사라는 직업은 소위 `전문직(professional)'의 길로 들어섰다.

글레이저(Nathan Glazer)에 의하면 전문직(profession)은 `대전문직(major profession : 의학, 법률, 비즈니스)'과 `소전문직(minor profession : 사회사업, 도시계획, 교육)'으로 분류되는데, 이들 전문직은 특정 목적에 가장 적합한 기술적 수단을 선택하는 도구적인 문제해결사(instrumental problem solver)로서 `기술적 합리성(technical rationality)'을 신봉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의사는 특정 환자의 치료라는 목적에 가장 적합한 질병치료 수단을 선택하는 문제해결사로서 기술적 합리성에 근거하여 행동한다는 것이다.

#의학의 특징, 복잡성,불확실성

기술적 합리성이란(교과서의 질병론처럼 명료하고 도식이 가능한) 아주 잘 정의된 문제를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로부터 얻어진 이론과 기술을 가지고 풀어나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20세기 초 의학이 대학의 학문이 되면서부터 생긴 의학적 실천에 대한 인식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20세기말 경부터 이 같은 인식론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의료전문직의 실천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강화되어 가고 있다. 의학은 `아주 잘 정의된 문제'를 다루지 않을 뿐더러 체계적, 과학적 연구로부터 얻어진 이론과 기술만으로 그 문제를 풀어나가는 학문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가완데(Atul Gawande) 등 전문직의 실천을 연구한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의학은 불완전한 과학(imperfect science)이며, 의학의 실천은 복잡성, 불확실성, 예측불가능성, 패러독스를 특징으로 한다. 때문에 숀(Donald Schon) 같은 사람은 의사를 비롯한 전문직의 실천 환경을 하이랜드(highland)가 아니라 질퍽거리는 늪 저지대(swampy lowland)라고 불렀다.  

전문직이 접하는 문제들은 결코 잘 정의되는 법이 없고 간단명료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항상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하다(환자가 가지고 오는 증상은 복합적이며 명료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깔끔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 성싶으면 다시 또 새로운 정보가 등장하여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는다. 여기에 환자의 친지나 직장, 거주환경이 개입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문자 그대로 `질퍽거리는 늪 저지대'이다) 현실의 문제는 교과서적 지식의 `깔끔함'과는 놀라울 정도로 동떨어져 있다. 이렇게 문제 자체가 불명료할 뿐 아니라 문제에 대한 해법도 불확실하고 그 해법을 적용할 경우에 나타날 결과는 더욱 예측불가능하다(단지 확률의 범위에서만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환자의 문제만이 복잡한 것이 아니라 의사가 함께 일해야 하는 수많은 서비스 제공자(간호사, 사회복지사, 의료기사, 임상심리사 등등)들이 있다. 이들은 언제든지 자신들 나름의 역할과 이해관계를 임상현장에 투입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임상현장의 환경은 언제든지 여러 전문직간의 문제로 복잡해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한 사람의 의사는 다른 의사와 정보를 주고받고 특정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집단은 또 다른 많은 사람들과 정보를 주고받는다. 이들은 나름의 경험과 사고방식, 선입견, 개인감정, 반응양식,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을 가지고 환자를 둘러싼 대화 장면에 들어온다. 이들 사이의 대화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정보 송수신의 오류, 정보의 왜곡, 혼선, 지연 등이 의학의 실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불확실성이 의료의 `본연의 상태(ground state)'이며, 의학이 `불완전 과학'이라고 이야기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같은 복잡성, 불확실성, 예측불가능성, 패러독스라는 의학의 특성은 의사의 실천에 오류가능성이 항상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오류가능성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최선의 실천을 할 수 있는 전문직은 어떻게 양성될 수 있는 것일까? 미국 원자력산업 사상 최대의 사고로 기록되고 있는 스리마일 섬(Three-mile island) 원자력 발전소 사건을 연구한 숀(Donald Schon)은 사고가 대형화된 것은 발전소 기사들이 문서화된 절차, 프로토콜에 의존하고, 작업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예기치 않은 의외의 `경이(surprise)'에 대한 준비를 갖추도록 훈련되지 않았다는 데에서 원인을 구하였다. 이 같이 복잡하고 불확실하며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하는 전문직은 작업 흐름도를 잘 익힌다고 해서 오류가능성을 줄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숀은 전문직의 실천을 `행위속의 성찰(reflection-in-action)'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행위속의 성찰(reflection-in-action)'이란 전문적 실천을 하면서 현재의 경험을 깊이 통찰하고 여기에 자신의 감(感)을 연결하며, 자신이 적용하고 있는 이론이 무엇인지, 적절한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복잡하고 불확실하며 예측 불가능한 전문가적 실천 상황은 끊임없이 의외의, 예측하지 못한 경이(교과서나 프로토콜에서 배울 수 없는)를 드러내고 게다가 전문가적 실천 그 자체에 의해 상황이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즉, 의사는 `행위속의 성찰(reflection-in-action)'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복잡한, 실제상황에서의 실천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의학교육 환경에서 학생이 복잡한, 실제적 상황에서 의학을 실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소비자로서 권리의식이 향상된 환자들은 학생의 시행착오에 대한 인내심을 대폭 철회하였고 대다수의 환자들이 2∼3월에 입원하면 좀 더 서툰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는 배경을 잘 알고 있다. 이에 따라 생존경쟁을 위해 서비스를 향상해야 하는 병원들은 학생들에게 실천학습을 허용할 여유가 없다. 또한 시뮬레이션, 가상현실 등 교육 테크놀로지가 발달함에 따라 환자에게 위해를 입히지 않고 학생에게도 너무 심한 좌절을 주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안전한, 가상 환경에서의 교육'이 가능해진 것도 임상현장에서의 실천을 통한 학습이 축소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런 새로운 교육 테크놀로지는 학생의 실천학습을 보다 풍부하게 하기위해 등장한 것이지만, (많은 비용이 들지만) 가상의 실천이라는 비교적 쉬운 대안을 제공함으로써 역으로 보다 역동적인 실천학습을 대체해버리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가상학습 만능주의 발상 위험

전문직 양성을 위한 실천학습의 장면을 과도하게 단순화하는 대학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단지 교수의 진료행위를 관찰하거나 가상 시뮬레이션으로 실천학습을 대체할 수 있다는 발상(적지 않은 대학이 그런 발상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은 결과적으로 전문직을 단순노무직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가능성이 있다.

전문가적 실천에 있어서 원래 행위와 지식, 학습은 완전히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존재이며,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의사들이 진료를 할 때 이 세 가지는 서로 분리된 활동이 아니라 `하나'로 일어난다. 학생들은 실제 상황에서 실천을 통해 `행위속의 성찰'을 익혀야 하며 그래야만 의학이라는 태생적 불완전 과학의 유능한 전문직이 될 수 있다.  

현재와 같은 교육환경에서 진정한 전문가적 실천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과정 개발자들의 각성과 노력, 그리고 전문직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행위속의 성찰' 혹은 `행위에 대한 성찰(reflection-on-action)'을 육성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교육병원 관리자들의 각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점이다.



 



신좌섭 <서울의대 의학교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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