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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의학교 정비...의제 개정 시도 <13>
나가사키 의학교 정비...의제 개정 시도 <13>
  • 의사신문
  • 승인 2007.06.1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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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이시카와(石川)가 배진한 후 의국(醫局:병원에서의 의사 대기소)으로 물러나서 치료법을 의논하려 할 때, 석천이 말하길, 나에게는 묘안이 없으니 전부 당신에게 맡긴다고 하여 내가 말하길, 대량의 아편을 사용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곧 아편 6 grain을 돈복(頓服:단번에 먹음)하게 할 것을 진언하기로 결정하였다. 남몰래 이것을 오카베에게 보고하니까 오카베는 본래 나가사키에 있을 때 약간의 의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였기 때문에 이것을 허락하였다. 곧 환약으로 제조하여 돈복하도록 진상했다.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공은 수면에 빠져서 코 고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았다. 이에 다시 감홍(염화제일수은)과 야라츠바(葯剌巴)의 합제(合劑)를 만들어서 오카베에 고하여 말하길 내가 아침 깨어나면 이 약 한 포를 돈복케 할 것을 청한다고 하였다.

이 때 이미 점등 때가 되어서 오카베가 말하길, 경들은 아마도 매우 피곤할 것이니 마땅히 우선 여장을 풀고 뜻대로 휴식을 취하라, 만일 이상이 있으면 신속히 소환하겠다고 하였다. 곧 짬을 내어 여인숙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배진하려고 이시가와와 함께 등전하였는데 공은 아직도 숙면 중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어떤 방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오후 1시 반이 되어서 비로소 깨어났다. 진찰하는데 공이 말하길 유쾌하게 한 잠을 자서 인사(人事)를 잊었다. 다만 지금은 조금 머리가 무거운 듯한 느낌만 있다고 하였다.



나가사키 의학교 정리

곧바로 이 하제(下劑)를 진상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도 또 문안을 드렸더니 공이 흔연히 말하길 나의 병은 이미 나았다. 자금부터 내진은 필요 없다. 쇼오군이 쿄오토오에 도착할 때까지 마음대로 지내도 좋다. 만일 가벼운 병이 있을 때는 신속히 소환할 것이라고 하였다.

오호 이 시국이 어려움에 당면하여 장수배(長袖輩: 무사계급이 아닌 귀족, 승려를 조롱하는 말), 무뢰의 낭자 등에 의해 교사되어서 헛되이 쇄국양이를 주장하였다. 영명한 요시노부 공의 변론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한 경우에 빠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실로 생각하면 한심기속(寒心肌粟)한 일이었다.

1862년 2월 쇼오군 이에모치(家茂) 공이 상락했다. 동료 20여명이 수행 하러 왔다. 나도 또한 조석으로 봉사했다. 몇일이 지나지 않아서 나가사키 부교오인 오오쿠보 분고(大久保豊後) 수로부터 상신이 있었는데 나에게 나가사키행을 명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나가사키 의학교장인 토츠카 분카이(戶塚文海)가 생도의 신망을 잃어서 학교가 나날이 쇠퇴하고 있었으나 교사 보-도엥(Anthonius Francisus Bauduin : 네덜란드 육군군의 나가사키 양생소에서 의학을 강의함)은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모른 채 생도의 출석수가 나날이 감소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또 이를 우려하여 부교오에게 고하였다.

부교오는 남몰래 그 사실을 찾아 일대개혁을 시행하려고 관에 나를 부탁하여 그 임무를 담당케 하였다. 따라서 나는 곧바로 나가사키로 가서 부교오에게 나아가 교사에 관하여 묻고 그 실태를 파악하여 속리배를 더욱 힐문하였고, 그것을 생도들에게 알려서 단호히 일대개혁을 하려고 했는데 서생들이 웃으며 말하길, 선생이 간 후에 실로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폭정횡렴이 있었다. 일동이 참아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때 선생이 나가사키로 오게 된다는 말을 듣자 그는 수렴(收斂)을 그치고 이것에 관한 게시는 모두 철거했다. 이것은 그들이 내심 꺼림직한 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흡사 욱일(旭日)의 광휘에 대해서 군마(群魔)가 소산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하건대 이 모두 교장의 책임일 것이다. 내가 말하길, 내가 개혁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거의 소멸되었다고 들었다, 지금 경들이 일상생활하는 곳을 보니 불결함이 왜 이렇게 심한가, 마치 돈책계시(豚柵鷄쳛 : 돼지 울타리와 닭 횟대)와 같다, 차마 볼 수가 없다. 교사(校舍)의 수선 같은 것은 관에 부탁하여 차차 착수해야 겠지만, 우선은 앉은 자리를 새로이 고쳐야 할 것이다. 이 일은 긴급을 요하는 것이기에 관에 요청하는 번거로움을 생략하고 자비로 해라, 단 후일에는 관비로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무리들은 모두 이것을 승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창호문, 다다미 등이 모두 깨끗 해졌다. 분고(豊後;오이타 현에 있던 번) 수는 이것을 듣고 길게 한숨을 쉬며 말하길 국장이 사람을 얻는 것과 얻지 못하는 것에 의해 그 이해가 어찌 이같이 심한가, 당로자가 가장 주의해야 할 바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모든 일이 거의 정리되어서 나가사키를 떠나려고 할 때 부교오도 태명(台命; 쇼오군 등 귀인의 명령)에 의해 상경하도록 되어 그 후임으로 나의 친구인 핫토리 아야오(服部綾男)가 왔다. 따라서 나는 분고 수와 함께 기선을 타고 오오사카에 도착하여 경사(京師:수도)로 들어갔다.



의제를 개정하려고 하다

6월에 쇼오군은 해로로 귀부하였다. 나는 나카센도오(中仙道)를 거쳐서 귀부하였다. 재경 중에는 늘 군 곁에서 모시고 있어서 종래 의사의 폐습을 여러 차례 말하였다. 이것은 단지 한화(閑話)에 그쳤지만, 군이 그 이유를 알게 되어서 다른 크게 의제를 개혁하려는 욕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에 마츠마에 시마(松前 志摩: 토카이도오에 있으며 현재의 미에현 동부의 시마반도에 있던 번) 수 카쿠로오가 장이 되었는데, 위로는 마츠다이라 가쿠(松平春嶽:에도 바쿠후 말기의 4대 현인)가 있어서 늘 두 곳을 왕래하며 속마음을 토로하여 귀천의 지위가 다르지만 정은 친구와 같아서 당시의 정사 이야기도 하고 법을 어기며 예를 잃어버린 일도 있었다. 하지만 본래부터 그 때 뿐인 일로 하여 크게 책망 받은 일 없이 모든 일이 뜻대로 되었다.

바쿠후 창업 때의 제도는 관습상으로는 의(醫)를 법률의 밖에 두고 승려와 같은 자로 대우하였다. 그렇지만 의사는 무관과 달라서 전장에서 무기를 버리고 적을 등지는 일도 책망 받지 않고, 또 내전에 들어가서 부인과 만나는 것도 그 여자가 세 사람 이상과 같이 앉은 곳이라면 서로 대화하는 것도 허물이 되지 않는다. 또 만일 잘못하여 독약으로 사람을 죽인다 해도 그 죄가 매우 가볍고, 성문의 출입도 무신은 그 직책에 따라서 정해진 곳이 있지만 군의 곁에서 모시는 의사(오의사, 호오겐)는 어느 쪽 문이라도 이용할 수 있었다.

김강현 역<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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