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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쇼오군 요시노부공을 진찰하다 <12>
마지막 쇼오군 요시노부공을 진찰하다 <12>
  • 의사신문
  • 승인 2007.06.02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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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치, 타시로가 복종하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따라서 복종하게 되었으며 쥬쿠에서의 소란은 전부 그치게 되었다. 그런데 속리 등은 교내의 정숙을 보고 의아해 하며 말하길, 예전에 오가타(緖方) 교장일 때는 주야로 회독(會讀), 윤강(輪講:한 책을 여럿이 분담하여 차례로 강의함)이 있어서 우리들은 그 공부를 칭찬하여 이것을 장관에게 보고한 적도 있었는데, 요즘은 생도가 침묵하고 그저 책상에서 책만 보고 오전 오후 통틀어 3번의 강의를 듣기만 한다. 이것은 학문을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를 듣고 웃으면서 말하길, 경(卿)은 생도가 소란스러운 것과 침묵하여 독서하고 공부하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가? 만일 소란을 원한다면 매일 청년 자제에게 큰 소리로 노래 부르며 춤추도록 할 수 있다, 이 의학교가 발전하는 길은 학교에서 대의명가를 많이 배출하는 것이다, 생각건대 수년이 지나지 않아 반드시 대가를 배출하게 될 것이다. 어찌 눈앞의 소란스러움을 기뻐하겠느냐라고 하였다. 속리 등은 나의 말에 복종하지 않고 도리어 이것을 장관에게 보고했다. 로오쥬우도 또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타케우치겐도오(竹內玄同)를 질책했다. 겐도오가 말하길, 이것은 관에서 결코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 그저 학교의 일은 마츠모토에게 일임해야 한다고 하여 논쟁은 멈추었다.

겐보쿠의 시기와 해부소 설립 시도


이토오 겐보쿠(伊東玄朴)는 쥰을 퇴임시키려고 했으므로 이것을 기회로 삼아 말을 꾸며내었는데, 마츠다이라 가쿠(松平春嶽) 다이로오, 미즈노 다이켄모츠(水野大監物) 로오쥬우 등이 각각 그 신하 의생에게 이를 탐색케 하였지만 전혀 얻는 바가 없었고 나중에 주의에 그치자, 꼬치꼬치 캐는 것은 그만두었다.

어느 날 내가 당직할 때 혼자서 국중(局中)에 있었는데 우연히 겐보쿠의 행위에 관하여 묵시할 수 없는 상황을 발견하여 곧바로 당로자(當路者)에게 이를 이야기하였다. 다이로오, 로오쥬우도 크게 놀라서 숙고한 끝에 처리하기로 되었는데, 예전에 그가 나를 비방한 일에 대한 심문이 있었다. 나는 일일이 그것에 대답하고 물러났다.

카쿠로오가 다음 날 그것을 상신하자 겐보쿠의 등영(登營)은 멈추게 되었고 짓시이 배진(拜診)도 멈추었으며, 타케우치 겐도오(竹內玄同)가 대신 호오인(法印;의사의 최고 계급, 밑으로 호오겐(法眼)·홋쿄오(法橋)가 있음)으로 서임되어 이센인(渭川院:타케우치 겐도오의 별칭)이라 불리게 되었다.

겐보쿠는 면직된 후 빈번히 권력가에 출입하여 자기의 실세를 만회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그는 늙고 교활하여서 속으로는 나를 미워하여도 적대시하진 않았고 오히려 겉으로 존경하는 척하면서 날마다 맛있는 안주를 주거나 혹은 문방구를 마련해 주는 등 나의 환심을 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또 타케우치에게 부탁하여 어떠한 직위라도 얻을 수 있도록 청하였고, 타케우치는 그 의견을 나에게 물었다. 그 결과 의학교 고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와카도시요리(若年寄: 에도 막부의 관직명으로 로오쥬우의 다음 직위로 쇼오군에 직속되어 정무(政務)에 참여하고 하타모토(旗本)를 통할했음)가 의학교를 순시한 적이 있었다. 대감찰, 감찰이 함께 따라 왔었다. 나는 이들을 맞이하고 나중에 지소인형(紙塑人形: 일본 종이의 재료인 닥나무 등의 섬유를 풀로 이겨서 굳힌 다음에 틀에 넣어 말린 인형)을 풀어서 그 위치, 관능(官能)을 개설(槪說)하였다. 동시에 말하길, 종래 한방의사(漢方醫師)는 내경(內景: 한방의 내부장기에 관한 책을 몰랐다.

그 난경(難經: 한방의 여러 분야를 종합적으로 서술한 책)은 해부학 책이지만 장부를 배치하는데 헛되이 음양오행으로 하여서 장부(臟腑)의 위치도 잘못된 점이 매우 많고 장,위도 그 위치가 틀리고, 신장, 방광도 그 관능(官能)을 오인하는 등 공론망언으로 사람을 틀리게 한 일이 대단히 많다고 누누이 그 무능을 설명하니 모든 유사(有司:관리)들이 이에 크게 감복하여, 거의 미몽(迷夢)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해부는 의학에 있어서 가장 긴요한 것인데 우리 의학교 내에 아직도 해부소(解剖所)가 없는 것은 이에 대한 규정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더니 유사 등은 크게 그렇다라고 하며, 학교측 여분의 땅으로 충당할 수 있다고 이야기되었다. 또 매일 참죄인(斬罪人)의 시체를 두 번씩 내려 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이것도 또한 허가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해부소로 사용할 땅은 저 겐보쿠의 정원과 접해 있어서 그 시체가 집 가까이 오는 것을 싫어하여 남몰래 카쿠로오의 속관(屬官)으로서 세력 있는 자에 의해 이것을 저지할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허가령이 지연되어 쉽게 하달되지는 않았다.

요시노부공 진찰 위해 상경


쿄오토오(京都)에서 근무하는 대감찰 오카베 스루가 수로부터 편지가 왔다. 매우 급한 일이 있으니 쇼오군 가(將軍家)의 상경에 앞서서 이시카와 겐테이(石川玄貞)와 함께 상경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히토츠바시 공(一橋公:토쿠가와의 3대 명문가로 요시노부의 본가)의 병으로 인한 내명(內命:비밀명령)이었다.

곧 마츠다이라 가쿠(松平春獄)씨가 먼저 출발하는데 따라 함께 시나가와(品川; 토오쿄오에 있는 토오카이도오 53개의 역중 제1역이 있던 곳)에서 순동환(順動丸=철갑선)에 탑승하여 오오사카에 도착하고 곧바로 쿄오토오로 갔다. 요시노부 공의 여관인 동본원사(東本願寺)에 가서 오카베(岡部)와 면회를 하였는데 오카베가 말하길, 요시노부 공((慶喜公:제15대 쇼오군으로 350년을 이어온 에도 막부 정권을 메이지 천황에게 반환)은 역상(逆上: 앞뒤를 가리지 않고 불끈함)이 심하여 신경과민이 되었고 시신(侍臣) 등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당신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하루가 천추(千秋)처럼 생각됐다.

의복을 갈아입지 말고 바로 함께 군(君)앞에 문안 인사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동시에 말하길 공의 병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일야(日夜)로 입궐하여서 여러 공경(公卿)과 논쟁을 벌였다. 요즘 무모한 양이설(에도말기 외국과의 통상을 반대하며 쇄국을 하려는 사상, 나중에 에도막부를 무너뜨리는 운동의 주류가 됨)이 국가를 위태롭게 함으로 단연코 개국(開國), 와시(瓦市=무역)를 관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 완미(頑迷)를 깨뜨리려고 논쟁하여 잠시도 평안할 날이 없었다. 따라서 신경과민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한다.

김강현 역 <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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