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3 16:30 (화)
우두접종 법제화로 인구증가에 기여 <11>
우두접종 법제화로 인구증가에 기여 <11>
  • 의사신문
  • 승인 2007.05.18 09: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가 키요오에 있을 때 타이슈가 특별히 나를 신임해서 그의 신하 가운데 장기에 체류하는 오카무라분우에몬(岡村文右衛門)에게 늘 위생에 관한 것을 묻게 했다. 게다가 그의 시의(侍醫) 4∼5명으로 하여금 나와 함께 Pompe씨에게 배우도록 했다.

어느 날 말하길 우리나라 조종(祖宗:1대 쇼오군 토쿠가와 이에야스)이 처음 치쿠젠(筑前)에서 봉해진 이후 이미 200여년이 지났는데 매년 나라의 인구는 줄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약 5만여명이 감소했다.

치쿠젠을 위해 위생 계획

필경 의료의 졸렬에 기인한 것인지, 어쩌면 다른 것에 원인이 있는 것인지, 바라건대 이를 회복하는 방법을 서술하여 교수를 시켜달라고 했다. 나는 곧 그 방법을 생각하고 글을 써서 제출했다. 그 방법은 우선 식록을 받는 의사로 하여금 영내를 순행케 하여 실제로 환자에게 가서 치료방법, 섭생을 어떻게 하는가 설명하고 동시에 선량의 약품을 각 마을에 나눠주고 촌장이 이것을 보관하게 하여 쓰임이 있을 경우에 이를 의생(醫生)에게 주도록 하고, 용량은 하나하나 상세히 명기해 주자고 하였다.

또한 별도로 간략한 치료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의사가 영내를 순회할 때는 반드시 우두를 가지고 다니게 하여 곳곳에서 접종하도록 하며 이것을 법령으로 정해 접종하지 않는 자는 처벌하겠다고 공포해야 하며, 그 두묘(痘苗)는 장기에서 수송될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분우에몬을 통해서 친히 번후(藩侯)에게 상신하게 하였다. 후(侯:타이묘 쇼오묘-타이묘가운데 비교적 작은 영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가 크게 기뻐하면서 간이의료서(簡易醫療書) 여러 부를 등사하게 하여 전부 건의한 그대로 실시하게 했다.

의사는 지방을 나눠서 순서를 정하여 순회하고 수십일이 지나 실적을 올려서 촌의(村醫)의 치료가 점점 진보하게 되자 영내의 인민은 크게 기뻐하여 위생에 주의하였다. 종두법 또한 골고루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1년이 지나서 호적을 검열해 보니 인구가 증가했고 2년이 지나지 않아서 국조(國祖) 시대보다 더 많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군촌(郡村)의 장(長)을 성하(城下:영주가 사는 성을 중심으로 생긴 도시)로 불러서 축배를 하사하고 의사는 포상을 받았으며 나에게도 또한 보수로서 많은 금은을 주었다. 후에 들으니 국민이 이것을 매우 고맙게 여겨 그 비도(費途:돈의 用途)에 충당하려고 많은 헌금을 하여 오히려 전년 이래로 위생과 치료에 사용된 비용의 배나 되었다고 한다.

마츠모토 쥰이 생각하건대 인구의 증가는 전적으로 종두의 보급에 의한 것이다. 옛날 종두법이 없을 때에는 악성 천연두 때문에 소아 및 장년자가 죽는 것이 실로 무수히 많았는데, 오늘 날 이에 대해 말하면 대부분 거짓말이라고 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유행 참독(慘毒)이 퍼지는데 있어 일부만을 보충,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신 후 해마다 인구가 10만씩 증가한 것은 전적으로 종두의 효력에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의법(醫法), 위생 같은 것은 아직 이에 비해 그 공이 어느 정도인지 말할 수가 없다. 우두 접종법은 장기의 의사 요시오케이사이가 몬니쯔끼에게 가서 부탁하길 3번, 비로소 접종법을 익히고 두(痘)에 걸린 아이를 얻었다. 쿠로야마(黑山) 후, 나베시마(鍋島) 후, 모오리(毛利) 후, 토오도오(藤堂) 후가 이것을 도와서 그 신하의 아이에게 접종케 하면서 에도에 도착하였고 에도의 모든 대가가 자금을 출연하여 그 확장을 도모하였으며 사람에서 사람으로 접종을 하여 오늘날의 융성에 이르게 되었다. 요시오(吉雄)가 우두를 익힌 것은 아마도 카에이(嘉永) 연간(1848∼1853)일 것이다. 내가 그 공이 많다고 여겨, 지난해 현령(縣令)에게 정부에 상신하여 훈장을 수여할 것을 청하였는데 애석하게도 목배(木盃) 한 개를 하사 받는데 그쳤다. 당로(當路)의 사람은 무엇을 기준으로 이러한 박우(薄遇)를 하였는지, 화재를 당한 사람을 위해서 의연금 15원을 내는 것과 제국의 인구를 해마다 10만여 명 증가시키는 방법을 창시한 것 중 그 공의 우열은 바보라도 알 수 있다. 얼마나 그 마땅함을 잃음이 심한가.

당시 유럽 책을 읽으려고 하는 자는 대개 의가에 가서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는 처음 유럽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사람이 의자(醫者)였기 때문이다. 이 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츠보이 히라기키 선생, 오가타 코오안(緖方洪庵) 선생의 주쿠(塾)에 있는 자는 의사가 아니고, 제번(諸藩)의 무사로서 병서를 읽는 자가 많았고 헛되이 문법서를 회독(會讀)하고, 서문(序文) 범례(凡例)의 명문(明文)을 강구하는 것에 힘쓰는 사람들을 학자라고 하였다. 내가 감독하는 의학교 또한 문법을 배워 난문(難文)을 해석하는 것을 긴급한 요사(要事)로 하였다. 나는 교두(敎頭)가 되면서 병학가(兵學家)의 행위를 멈추게 하였고 문법서의 강독을 금지했다. 그리고 구리(究理: 메이지시대의 용어로 물리학), 세이미(舍密:화학의 옛말,네덜란드어의 차음), 약제(藥劑), 해부, 생리, 병리, 요양, 내외과 각 분야를 정하여 오전 1회, 오후 2회 순차로 강의를 하였고, 다른 책 읽는 것을 엄히 금했다. 만일 불복하는 자가 있다면 신속히 퇴교하도록 했고 이 조치를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자는 곧바로 나의 곁으로 와서 그 취지를 논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에도 의학교서 새로운 교수법 시행

생도 중에서 아다치토모(足立寬), 타시로키토쿠( 田代基德) 등은 쥬쿠 가운데서 주도권을 잡는 자라 아침, 저녁으로 와서 논쟁을 벌였다.

그들이 말하길, 의과의 일은 책 속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만일 독서를 하지 않으면 후일 귀향 후에 의심스러운 점을 분별하고 말의 의미를 강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여 말하길, 의문(醫門) 전과(全科)를 공부하여 암기하면 반드시 3∼4년으로 졸업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는 것은 단지 미혹(迷惑)을 풀기만 할 뿐이고, 이미 강의를 들어 망각하지 않게 되면 책이 없어도 된다, 게다가 자기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은 책을 읽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내가 교두인 것은 의학을 배우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나는 그 길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선각자로서 여러분을 교도(敎導)하며 미혹이 없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뜻을 이해 못하고 그저 책만 의지하라는 것은 10년 전 가르치는 일이 아직 없었던 시기의 일이라고 간곡하게 되풀이하며 이를 변론하였는데, 여전히 와서 논쟁하는 자가 그치지 않았다. 순순히 이것을 타이르자 후에는 마침내 나의 뜻을 이해하여 드디어 복종하게 되었다.

김강현 역<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