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2:01 (금)
근대의학의 기초확립 위한 후학 양성 전념<9>
근대의학의 기초확립 위한 후학 양성 전념<9>
  • 의사신문
  • 승인 2007.05.02 17: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 논쟁은 매우 귀찮았지만 외국 공사 및 에도의 유사(有司) 등 모두가 다카하시 마마사카의 잘못을 알고 있기에 마침내 그의 말은 온전히 이행되지 않고 오히려 나의 세력이 늘어나 전국 각지에서 책 상자를 등에 지고 와서 배우려는 자가 나날이 늘어나 의학교는 생도로 늘 가득 찼다.

병원 공사를 완전히 끝낸 후 나도 병원 근처에 있는 관사로 이사했다. 이것이 우리 일본에서 공립병원의 효시이다. 곧바로 Pompe 씨를 원장으로 하고 나는 부원장이 되어 3년간 환자를 치료하고 동시에 강의를 듣고 전습을 받았다.  

의생들의 유럽유학 추천

  Pompe 씨의 교수법은 자신이 모든 책을 읽고서 그 중에서 긴요하고 유익한 부분을 골라서 필기하여 그것을 강의하였다. 동시에 치료상 중요한 이야기를 교환하고 고인(古人)의 실험을 설명한 후에 필기를 해주어 복습이 편하도록 하였다.

나는 또 매일 초저녁에 자제를 모아서 낮에 배운 바를 3시간 정도 다시 강의하였는데, 들으러 오는 생도는 늘 70∼80명 이하로 오는 경우가 없었다.이같이 하는 중에 3년이 지나 Pompe 씨는 고용 만기가 되어 귀국하게 됐다. 따라서 나는 소년 자제를 선택하여 그를 따라서 화란에 유학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허가가 나왔다. 곧 이토오 겐보쿠(伊東方成), 임연해(林硏海) 등이 있었다. 이 때 사관(士官)으로는 에노모토(?本), 아카마츠(赤松), 기노시타(木下), 만넨(万年) 등이 함께 화란으로 유학을 명받았다.

이 때 Pompe 씨는 간절히 나의 동행을 권해서 정부에 청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이를 사양했다. 왜냐하면 내 나이가 이미 많아서 일신을 위하고 영예를 꾀하여 국고를 사용하는 것보다는 유능한 청년 자제를 선발하여 보내고, 나중에 오랫동안 국가의 쓰임을 받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서양의 의사(醫事)가 겨우 본 궤도에 올랐기 때문에 이 기회에 에도에 의학교를 설립하여 종래의 악습을 씻어버리고, 유럽에 유학을 가서 공부한 생도가 귀국하면 그들에게 어울리는 일을 얻게 하려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러시아는 터어키·영국·프랑스 등과 전쟁을 하던 중에 러시아 함대가 쫓겨서 나가사키 항으로 왔다. 배의 돛대(마스트) 이외에 부서진 것을 수리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곧 상륙 허가를 얻어 나가사키 항구의 건너편 해안인 호심사(護心寺)에 정박했다.

병사들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가 힘들어 걸핏하면 농가의 부녀를 희롱하곤 했다. 함장은 이것을 우려하여 화류(花柳)에 가는 것을 허락하려고 했지만 매독 전염을 두려워하여 창기의 매독 검사를 부탁했다. 부교오 오카베는 검사를 하긴 해야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시행한 일이 없고, 유곽에 출입하는 자들이 고정(苦情)을 호소하는 분요(紛擾)를 일으킬 것을 근심하여 나를 불러서 그 방법을 물었다.

내가 말하길, 나에게 생각하는 바가 있는데 그것을 잘 설명해야 할 것이라 했다. 곧바로 유곽인 카케츠로(花月樓: 引田屋 유명한 요정의 이름)에 가서 주인을 불러서 이번에 정박한 러시아 사람이 부교오에게 부탁한 바를 말했다. 동시에 말하길, 부교오의 뜻은 유곽에 압박을 가하여 하지 않고 나로 하여금 가급적 원활하게 이를 계획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나의 복안을 말해야만 했다.

우선 그들이 거주하는 호심사(護心寺) 근방에 장옥(長屋)을 짓고 시마바라(島原) 주변의 여자 중 미추(美醜)를 따지지 말고 신체 건강한 사람을 골라서 10여 명을 사와, 그 장옥에서 러시아 병사와 접하도록 한다. 억지로 술과 음식을 요구하지 말고 그 화대는 비싸도 좋다. 그 영업시간은 아침 10시부터 저녁 6시로 정하고, 그 사이에 정오부터 1시간을 점심 휴식으로 하고 병사들에게 각 3시간씩 오락 시간을 준다. 그러나 격일로 아침 8시부터 10시까지 매독 검사를 시행하도록 하고 매일 오후 6시가 되면 그 창기들을 데리고 돌아가 숙소에서 휴식하도록 하고 그 숙소는 항구를 약간 벗어나도 좋다. 하숙소(下宿所)는 관에서 다시 명령하여 염가로 대여한다.

여자의 수고료는 한 사람의 창기에 금 1엔으로 하고 마루야마(丸山)의 제 1등 창기 수고료의 4배를 받아도 된다. 이 일은 역시 러시아의 사관(士官)과 논의해야만 한다. 검사는 우리 생도(生徒)가 한다고 말했다. 카케츠로(花月樓) 주인은 이것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삼가 지시를 따르겠다고 말했다.회담이 이루어져 이것을 부교오에게 고하니 오카베는 크게 기뻐하고 웃으면서 말하길, 관하(管下)의 사람이 외국인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은 많을수록 좋다고 했다. 곧 이를 러시아의 사관에게 말하니 그도 또한 기뻐하여 허락했다.  

매독검사법 창시

  일이 순식간에 결정되어서 곧바로 건축에 착수했는데, 본디 간단한 구조였으므로 며칠 걸리지 않고 공사가 완료되었다. 이 사이에 여자를 구하였는데 많은 수입에 기뻐하며 곧 10여 명을 구할 수 있었다. 카케츠로에서 의상을 제공하고 개업하도록 하였다. 누주(樓主)는 손님 수에 따라서 얻은 돈을 정산하여 분배하였더니 반년만에 각자 상응하는 돈을 완전히 저축할 수 있었다.

이 때 뜻밖의 매독검사법을 시행할 수 있었다. 처음 이틀은 Pompe 씨가 하였고 다음날부터는 생도들이 2∼3일 마다 교대로 하였다.

마침내 군함의 수선이 완전히 끝나서 함장은 그 무관을 데리고 나와 Pompe 씨를 카케츠로로 초대하여 향연을 열고 그 주선(周旋)의 수고에 대해서 사례하였다. 이 때 Pompe 씨는 웃으며 말하길, 이것은 모두 러시아의 관비로 했으니 무슨 감사할 것이 있느냐고 했다. 나도 이번에 검사법을 실제로 배울 수 있어서 훗날 이것을 우리나라에서 시행할 것을 생각하니 은근히 기뻤다.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 매독 박멸의 창시이다.

나가사키의 부교오 다카하시 마마사카는 면출(免黜)되어(오카베는 대감찰로 영전되었다) 후임으로 오오쿠보 분고(大久保豊後) 수가 왔다.이 사람은 나와 옛날부터 친구였다. 얼마 되지 않아 나 또한 동경으로 돌아갈 것을 명받았고, 돌아온 후 수개월이 지나서 시의(侍醫) 자리에 끼는 영광을 얻었다.

이상은 모두 키요오 체재 중의 일이었다. 부교오 오카베 스루가 매우 재능과 지식이 있어서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다. 또 밑에 있던 나카모치 쿄오지로도 또한 재간이 있어 나를 도와서 생각한 바를 관철시켰다. 생각하건대 서양 의학이 우리 나라에 들어오는 데는 나가이 겐바인, 오카베 스루가 등이 관여하여 일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강현 역 <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