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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과목의 파괴'를 우려한다
'전문과목의 파괴'를 우려한다
  • 의사신문
  • 승인 2007.05.01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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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들의 지원 양상이 빈익빈 부익부를 보인다는 것은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니다. 올해 전반기 전공의 지원 상태를 보면 비인기(?) 과의 경우 40%가 안 되는 저조한 지원율을 보이기도 했고 반면에 180%가 넘는 지원율을 보인 과도 있다.

병원과 과에 따라서는 전공의 선발에 실패한 곳도 있고 또 일부 과에서는 수련 중인 전공의가 그만둘까봐서 야단치기는커녕 모시고 살다시피 한다는 교수들의 이야기도 들린다. 그래서 교육이 제대로 되겠느냐고 한숨이다.

또 개원가에서는 많은 회원들이 진료과목을 바꿔달거나 추가하고 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진료과목으로 `성형외과'를 표방하는 개인의원들이 부쩍 늘었다(특정과목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부득이 사용하였음을 이해해주기 바라고 뒤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그만큼 개원현실이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성형외과'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표어가 `전문과목의 파괴'다. `전문과목의 파괴가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이다'라는 것이다. 누가 처음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함축적인 표현으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이 상당히 걱정스럽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나의 밥그릇(나의 전문과목이 성형외과이기 때문에 말하기가 상당히 어렵긴 하지만 오해는 없기를 바란다)을 빼앗길 것을 우려해서가 아니다.

내가 걱정하는 이유는 `전문과목의 파괴'라는 말이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전문과목의 파괴'라면 내과에서 성형수술도 하고, 신경외과에서 분만도 받고, 성형외과에서 고혈압도 치료하고 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일방적으로 타과에서 성형외과로 진출하는 것이다.

각 과마다 고달프고 힘든 전공의 과정이 무의미한 고행으로 평가 절하되는 것이며 전문의제도의 존재 자체가 의문스러워지는 것이다.

잠깐 감정을 가라앉히고 정리해보자.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결국 잘못된 의료정책, 턱없이 낮은 보험수가 때문이 아닌가. 건강보험으로는 병원유지가 어렵기 때문에 떠밀려서 비보험 항목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지 학문적인 열정은 아니지 않는가.

본인이 전공한 전문과목에 대한 자존심도 버려야 할 만큼 열악한 이 의료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먹고살기 위해 지금껏 관심도 없었던 분야, 밤새워 고생하며 배운 전공과목과는 상관없는 분야에 뛰어들어 뒤늦게 배우면서 스스로를 위안하여 외치는 말이 `전문과목의 파괴'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그 원인을 해결할 수는 없다고 해도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면서 해결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하고, 또 직접 나서지는 못하더라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의사단체의 활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져야만 언젠가는 그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원인을 알 수 없게 초점을 흐리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점점 더 원인에 무관심해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잘못된 의료정책에 대해서는 둔감해지고 무관심해지는, 그래서 결국은 포기하는 과정을 밟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이다.

여기서 아까 나왔던 성형외과 이야기를 마저 하자. 성형외과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말도 아니고 누구도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 글의 의도는 문제의 실체를 파악하고 해결에 관심을 갖자는 것이다. `타과에서 성형외과로 진출하는 것'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쓰이는 말이긴 하지만 이것도 사실을 가리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보험과에서 비보험과로 진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전문과목의 파괴'가 아니라 `비보험항목의 개발'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거스를 수 없는'이라는 표현 또한 절망감을 합리화하여 일어설 수 없게 만든다.

`현상황에 대한 합리화'에 초점을 맞춘 용어보다는 `사태의 본질'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용어만이라도 실제의 원인을 인식할 수 있게 해야 그 말을 사용할 때마다 원인이 의사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임을 항상 떠올리게 되고 더불어 의료정책에 대해서 늘 깨어있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글을 끝내기 전에 이 글의 제목부터 잘못 되어있음을 인정해야겠다. ``전문과목의 파괴'를 우려한다'가 아니라 ``전문과목의 파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우려한다'가 제대로 된 제목이고 이 글을 쓴 이유다. 문제의 초점은 `전문과목'이 아니라 `보험'이기 때문이며, 우리의 관심을 `보험'에서 `전문과목'으로 슬쩍 비켜가게 만드는 용어를 사용함으로 해서 문제의 핵심이 감추어지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박정일 <서울시의사회 정책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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