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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초 공립병원 건립 노력과 결실 <8>
일본 최초 공립병원 건립 노력과 결실 <8>
  • 의사신문
  • 승인 2007.04.26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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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음날 양관(洋館)에 가서 Pompe 씨와 상담하고 그 사진사에게 이를 알렸다. 동시에 나의 문하생 가운데 치쿠젠(筑前)의 사무라이 마에타 겐죠오(士 前田玄造)에게 명령하여 사진사를 수행케 했다. 이것은 일찍이 치쿠젠 제후께서 샷슈유(薩州) 제후로부터 선물로 받은 사진 기계를 현조(玄造)가 가지고 와서 그 기술을 배우려고 하였기에, 이 때가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어 사용케 한 것이다.

우선 내 집에서 자제(子弟) 수십 명을 세워놓고 이것을 찍게 하고 또 모생(某生)으로 하여금 갑옷을 입고 왜장도를 차고 선 자세의 사진을 찍었는데, 보통의 왜 나막신을 신고 버선도 신지 않은 볼품없는 것이었지만, 후에 이 사진이 영국 수도 런던에 있다고 친구로부터 연락이 온 일이 있어서 크게 웃었다(아직은 사진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하반신에 신경을 쓰지 못한 멍청한 모양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기술의 습득

  이 때 씨름의 흥행도 이미 끝나 막 안에서 상등(上等)의 씨름 선수를 난관(蘭館)에 초청하여 씨름 경기의 모습 승패의 모양 씨름판에 들어가는 모습 등 여러 가지 자세를 하게 하여 촬영했는데 안성맞춤으로 모두 성취했다. 전날 Pompe 씨가 실수한 것은 기계 약품의 품질이 좋지 않아서 생긴 것으로 영국인은 그 여러 날의 주선(周旋)의 노고에 감사하며 기계를 주었고 게다가 상해에 있는 모씨(某氏)에게 첨서(添書)하여 이후 약품 구입의 편의를 주고 갔다. 이것이 우리 일본에 있어서 사진을 성취한 효시로, 나중에 이곳에서 우치타 마루이치(內田丸一)가 배출되어 명성을 널리 알리게 된 것도 실제로는 이에 기반한 것이었다.

나의 전습이 나날이 진보하는 것과 관련하여 병원을 설립하는 일을 봉행 오카베 스루가수와 의논하여 동의를 얻었다. 따라서 이 일을 토지의 호상(豪商)인 코소네(小曾根: 켄도(乾堂)라고 불리움)에게 말하니, 켄도는 크게 기뻐 말하길, 내 소유의 밭 2단(段) 정도가 고지마 무라(小島村) 지나관(支那館) 소재에 있다. 땅이 높고 메말라서 조망이 매우 멋있다. 이 땅을 평탄하게 하여 담을 만들고 이것을 헌상하겠다. 이것은 나의 명예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진실로 나가사키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므로 이 일을 약속한다고 했다.

문생 가운데 치쿠젠(筑前), 에치젠(越前), 츠한(津藩) 등의 의생은 이것을 듣고 각자 자신의 국군(國君)에게 보고하니 모두들 그 계획을 찬성하여 각 번(藩)에서 수 백금의 기부가 있었다.

아쉽게도 이 때 돌연 부교오 오카베(岡部)에게 에도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있어 그 대신으로 다카하시 미마사카(高橋美作) 수가 취임했다(이 사람의 취임은 안동쓰시마(安藤對馬) 수의 비호에 의한 것이라고 들었다). 나가사키 사람들은 신임 부교오를 환영하지 않았는데 정령(政令)을 개혁하려 했으므로 몹시 인망(人望)을 잃었다.

게다가 그는 병원 설립을 무익한 것이라고 하여 에도에 상신하였다고 들었다. 따라서 나는 화란공사(和蘭公使) 톤쿠르(トンクル) 씨와 상의하였다. 톤쿠르가 말하길, 나는 머지않아 국사(國事) 때문에 출부(出府)하므로 로오쥬우(老中) 유사(有司: 에도 막부에서 쇼군에 직속하여 정무를 총괄하고 타이묘를 감독하던 직책 )와 응접 대화 시에 반드시 이것의 필요성을 말하여 신속하게 하명이 있기를 청하겠다고 했다. 또 나가사키의 신임 감찰사 아리마 타테와키(有馬帶刀)도 다카하시 마마사카(高橋)에게 말하여 역시 병원 건축의 그릇됨을 주장했다.

따라서 나는 아리마 타테와키의 관저에 가서 말씀드릴 것이 있다고 하였으나 아리마 타테와카는 만나주지 않았다. 급한 일이 있다고 하면서 면회를 허락 받지 못하면 떠나지 않겠다고 하여 그 날 오시(午時)부터 앉아서 점등(点燈) 때에 이르렀다. 그는 할 수 없이 면회를 해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크게 병원의 필요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종래 에도에 있던 고이시가와(小石川:강 이름) 양생소의 쇠퇴를 인용, 무익함의 증거로 들었다.

나는 에도의 양생소는 그 설립이 나쁜 것이 아니고 여러 해의 폐단과 그 법을 돌보는 자가 착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것을 폐지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이미 낡고 퇴락한 양생소를 가지고 증거로 삼아서 오늘 의미 있는 병원의 설립을 멈추는 것은 어찌 부당한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했다.

순순히 이해득실을 설명하니까 그는 잠시 심사숙고하다가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크게 나의 말에 설복되어 말하길, 내가 오늘 당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다카하시 마마사카 때문에 거의 잘못할 뻔 하였다.당신의 날카로운 설명 덕분에 의심이 곧바로 없어졌다. 지금부터는 반드시 당신을 도와 다카하시 마마사카를 설복시켜 빨리 에도에 그 뜻을 보고할 것이다라고 약속했다(이 때 아리마 타테와키의 속리(屬吏) 등이 말했다.

마츠모토는 반드시 서양의 사법(邪法)을 배워야 하겠느냐, 아리마 타테와키는 원래 대단한 양이가(攘夷家)로 병원의 잘못을 주장하는 자였는데 하루 아침에 마츠모토와 대화한 후 곧바로 그 말에 설복되었다. 이것은 사종(邪宗)인 기독교가 한 것이로구나 했다. 실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리마 타테와키은 식록(食祿) 7000석을 받는 자로, 성질이 조금도 사기(邪氣)가 없는 호걸이었고 다카하시 마마사카 같은 사람이 아니다).  

 병원건설 허가령

  그 후 수십 일이 지나서 에도에서 병원 건설 허가령이 내려왔다. 게다가 그것은 지체되지 않고 신속히 착수되어야 한다고 했다. 생각하건대 화란공사의 협조가 크게 힘이 된 듯 했다.

이를 듣자마자 나가사키의 사람을 비롯하여 의생 일동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부교오는 이것을 질투하여 어떻게 하든 방해를 하려고 많은 탐정을 풀어서 내 개인적인 일을 적발하려고 하였지만 하나도 말할 만한 것이 없었기에 그것은 헛일로 되어버렸다.

이로부터 부교오와의 사이에 틈이 생겨 온갖 일에서 서로 맞서는 상황이 되었기에 친족 사이토(佐藤尙中)는 이것을 매우 우려하여서 종종 나에게 충고하곤 했는데 드디어 변론하면서 예를 잃어버리는 행동을 하였다고 하여 근신을 명받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공사(公事)에 관한 것이 아니어서 나는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고, 날마다 외출하여 근신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잘못이 전하여질 것을 우려하여 자세한 사정의 전말(顚末)을 써서 옛 부교오인 오카베(岡部)에게 보고했다. 그 때문이었던지 추호도 해를 입지 않고 지나갔다.

김강현 역 <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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