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교육에서 교수 롤 모델의 중요성 <27>
의학교육에서 교수 롤 모델의 중요성 <27>
  • 의사신문
  • 승인 2007.04.23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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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티브 롤 모델 교수개발프로그램 정착

의료와 의사, 그리고 의학의 정체성 혼동이 심화되어 가고 있는 21세기 한국에서 기술적으로 뛰어나고 `의사다우면서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의사를 양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학생들은 `의학=숭고'라는 환상을 깬지(disillusionment) 오래되었고 의과대학에 입학할 때에는 이미 의료는 `인격' 등과는 무관한, 단지 하나의 직업일 뿐이라는 인식을 갖추고 들어온다. 세대와 세태 탓이다.

우리는 이런 학생들에게 우리가 아직도 곱게(?) 간직하고 있는 환상을 전염시키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한다. 이 노력은 으레 `교육과정이라는 블랙박스'를 개선하는 형식을 띤다. 우리는 졸업생들의 윤리의식이나 전문직으로서의 행태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고 이를 변화시키기 위해 교육과정을 바꾸고 그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또 바꾸고 또 바꾼다. 그러나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렇게 자꾸 교육과정만 바꾸다 생기는 몸살을 혹자는 `커리큘리스트(Curriculitis)'라고 비꼬기도 한다.

졸업생의 문제가 인식되면 곧 교육과정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교육과정 개선에 착수하는 것은 잘못된 일은 아니다. 의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실증주의자들이고 특히 의대교수는 `팩트(fact)에 근거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실증주의의 수호자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실증주의적이기 때문에 의학교육을 한다는 사람들 중에도 교육과정 개선이라고 하면 1∼4년의 교육과정 표를 바꾸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표' 역시 의대교수라는 수호신의 사랑을 듬뿍 받는 존재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강력한 영향 같은 것은 신비주의적 사고방식(`氣'를 생각해 보라)이고 사실 의학에서는 별로 달가운 주제가 아니다.


#실증교육 개선만으로는 한계

그러나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지식관리(knowledge management)를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지식에는 매뉴얼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명시적(explicit) 지식, 행간에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는 그러나 잘 표현되지 않는 비명시적(implicit) 지식, 그리고 구체적인 현장의 실천공동체(community of practice)에 참여하지 않으면 결코 배울 수 없는 따라서 일상적 실천 속에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배울 수밖에 없는 암묵적(tacit) 지식이 있다.

이 3가지 지식의 범주 중에서 의학과 같이 고도로 전문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의 역량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는 암묵적 지식이다. 이렇게 보면 명시적 지식만을 교육하고 그것만을 평가하면서 훌륭한 의사가 양성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육과정에는 공식적 교육과정(formal curriculum)과 비공식적 교육과정(informal curriculum), 그리고 잠재적 교육과정(hidden curriculum)이 있다. 공식적 교육과정은 학교에 의해 계획된, 학생들도 사전에 인지하고 있는 교육계획표에 나오는 교육과정이고, 비공식적 교육과정은 교수와의 만남이나 상담 등 비공식적인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교수학습의 과정이며, 잠재적 교육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학습자의 성장과 학습에 영향을 미치는 숨겨진 교육과정이다. 잠재적 교육과정은 아직 잘 밝혀져 있는 개념이 아니지만, `학교의 문화', `또래간의 상호작용 패턴', `교수나 선배의사의 롤 모델' 등이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틀림이 없다. 의학교육에서 잠재적 교육과정의 중요성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다.

의과대학과 병원은 학생이나 전공의에게 있어서 단순한 `시설'이 아니라 `좋은' 의사와 `나쁜' 의사의 정의(definition)를 만들어나가는 문화적 실재(cultural entity)이며, 도덕 공동체(moral community)이다. 그리고 이 도덕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교수나 선배의사의 롤 모델(role model)이다.

롤 모델이라는 용어가 생소한 분들도 있겠지만, 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롤 모델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롤 모델 없이는 인간이 될 수 없다! 필자는 어린 시절 아버님을 무척 좋아했는데(물론 지금도 좋아한다), 아버님은 체구가 작으셨지만 보폭이 아주 크게 걷는 습관을 가지고 계셨다. 나는 아버님과 동네 산책을 하면서 그 걸음새를 배웠고 열 살 되던 해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그 걸음새는 `삶에 대한 자신감' 같은 것으로 느껴졌고 나는 늘 골목길을 자부심을 갖고 걸었다. 이런 롤 모델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의학교육에서 보면, 훌륭한 선배 의사의 모습은 우리에게 포지티브 롤 모델로 작용할 수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의사들이 그런 포지티브 롤 모델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그 영향력은 어떤 교과서보다도 강력하고 강인하며 질기다. 아버님의 걸음새처럼….


#선배의 모습에서 '의사다운'배워

반면 우리가 아직도 곱게 간직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환상을 학생들에게 전염시키기 위해 공식적 교육과정을 통해 `의사다움'을 아무리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실습 병원에서 만난 선배의사나 교수가 의사답지 않은 행동(네거티브 롤 모델)을 보이면 모든 교육은 허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요즘 `의사 질'하기가 만만치 않은 세상이라는 것은 학생들도 잘 알고 있지만, 애써 부정하고 좋은 마음을 먹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학생들의 태도이다.

그러나 교수가 강의 중 무심코 던진 의료직에 대한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한마디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학생들의 생각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

기초의학을 지원하는 학생이 너무 줄어들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평소에 입에 달고 다니는 한 기초교수가 강의실에서 무심코 던진 냉소적인 한 마디를 `기초의학에 장래가 없다'는 근거로 삼아 열띤 토론을 벌이는 학생들을 본 적이 있다. 이런 것들이 소위 네거티브 롤 모델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의도적으로 한 말보다는 암묵적인 분위기나 무심코 한 말을 더 진실이라고 여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의학교육에서 교수나 선배의 롤 모델에 대한 조사연구가 이루어진 적이 없지만 캐나다의 한 조사에 의하면 교수의 50%와 전공의의 30%가 교수들의 좋지 않은 롤 모델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만만한 게 교육과정'이라고 우리는 뭔가 잘못되면 교육과정을 탓하고 교육과정을 들쑤신다. 그러나 수많은 교육과정 개선이 늘 실패로 끝나고 있는 것은 의과대학과 병원이라는 덕성의 생태계(moral ecology) 물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공식적 교육과정이 못나서가 아니라 물 밑에 숨어 있는 그러나 한층 크고 강력한 잠재적 교육과정을 바꾸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바꾸어야 하는 것은 교육과정만이 아니라 교수의 롤 모델, 학교의 문화, 또래간의 상호작용 패턴과 같은 것이며, 이런 것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교육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수의 롤 모델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잠정적인 결론은 `임용, 확인, 개발'이다. 교수 임용과정에서 연구업적만으로 교수를 뽑을 것이 아니라 `롤 모델'의 관점에서 심사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덕성이라는 것은 한순간에 길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교수로 임용된 후에는 교수가 롤 모델로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주지시키고 또 약속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포지티브 롤 모델 훈련을 교수개발 프로그램의 하나로 정착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신좌섭 <서울의대 의학교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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