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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감염…키니네‧목욕요법으로 쾌유 <7>
콜레라 감염…키니네‧목욕요법으로 쾌유 <7>
  • 의사신문
  • 승인 2007.04.19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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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부터 콜레라는 나가사키에 거의 격년으로 나타났다. 그 세 번째 유행에 이르러서는 봉행 오카베 스루가와 논의하여 시내에 만일 콜레라에 걸린 자가 있으면 신속히 료우준의 집으로 보고하여 치료를 부탁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이것은 내가 오오무라(大村)에 있을 때의 일이다. 봉행과 내가 각각 금 100엔(円)을 내어 시료(施療)의 비용으로 충당하고 시중의 개업의 10명과 숙(塾)의 생도 10명과 함께 격일로 당직을 하여 주야로 분담케 하였다. 치료의 방제(方劑)는 Pompe 씨의 지시로 물약과 가루약으로 정해 15방(方)을 만들어 그 용도에 제공하게 했다(콜레라에는 본디 일정한 방제가 없었으므로 이 15방은 그 증상에 따라서 주는 것이다).  

 나가사키 콜레라 유행

이같이 하기를 만 30일, 유행이 멈추고 난 후 장부를 만들어 각각 죽은 자, 치료된 자 및 다른 병으로 전환된 자, 이렇게 3종으로 나눠 조사하였는데 죽은 자가 가장 많았고 속증(續症)을 나타낸 자는 그 다음이었다. 죽은 자는 100명 중 50여명 이었고 치료된 자는 2∼3명 뿐이었다. 마취약을 복용한 자는 대부분 죽었다. 전신 목욕 중 키니네를 복용한 자는 대부분 나았다. 그 속발증(續發症)에 의해 사망한 사람은 신장마비였다. 그러나 전염의 우려가 있는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운도루리후(ウンドルリフ)는 전염 여부는 아직 결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이 끝난 후에 그 비용을 정산하면서 당직의(當直醫) 보수와 기타 일체의 비용을 지불하니 내가 사용한 경비는 처음 지출한 돈 외에 겨우 10여엔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치료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학술의 진보는 실로 막대하여 그 가치는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봉행 오카베 스루가도 그 적절한 성과를 기뻐하고 크게 칭찬하였다.

휴일에 나는 숙(塾)의 생도 2명을 데리고 납량(納凉)을 하러 오시(午時)부터 배 안에서 음식을 먹고 밤늦게 항구의 남쪽 해안에 상륙하여 유우소마치(遊所町 : 집창촌거리)를 거쳐 니시자카(西坂)의 집으로 갔다.
시간은 이미 12시를 넘어버렸다. 집을 지키는 사람이 말하길, 오늘 어떤 사람에게서 선물로 생선국이 왔는데 드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이를 보니 오이와 닭고기를 삶고 칡가루를 녹여 혼합한 것이었다. 여러 사람이 기뻐하여 이것을 찬밥에 말아먹었다. 마침 배가 고플 때여서 음식 맛을 운운할 것이 없었다.

음식을 배불리 먹어 속이 꽉 차 불편한 상태로 요에 들어가 편히 잠을 자던 중 한 시간쯤 지나자 변의(便意)가 있었다. 변소에 가서 다량의 설사를 했고 매우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변소에서 나와 요에 누우니 또 변의가 있어 변소에 가서 다시 다량의 설사와 동시에 구역질을 하고, 수액(水液)을 토했다. 요에 들어가자마자 다시 설사를 억제하지 못했다. 3회의 구토 설사 후 매우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허리와 다리에 힘이 빠져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기어서 변소를 나와서 자제(子弟)를 부르려고 하는데 목소리가 막혀서 부를 수가 없었다. 스스로 콜레라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급히 남자 하인을 보내서 요시오 케이사이(吉雄圭齋)를 불렀다. 기무라 츠이사이(木村遂齋)도 함께 왔다. 모두 말하길 콜레라 강의를 들었기 때문에 착각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라고 했다. 내가 말하길, 지금 어찌 너희들의 강의를 듣겠느냐, 빨리 Pompe 씨에게 알려 달라고 했다.

때는 여름밤으로 이제 막 새벽이 되려고 했다. Pompe 씨가 황급히 와서 진찰하고 말하길 정말로 콜레라다. 그렇지만 자네는 몸이 건강하고 심신이 모두 평온하니 반드시 나을 것이다. 빨리 전신욕을 해야 한다고 해서 주방 하인에게 명하여 뜨거운 물을 끓이게 하고 목욕통을 가득 채우게 하여 나를 이곳에 집어넣고 키니네를 먹게 했다.

그 목욕통에 들어가 뜨거운 물이 위장 부위를 지나자 동시에 구역질이 멈췄다. 충분히 목욕을 한 뒤 나와서 요에 들어가 숙면을 취하고 오후 1시가 지나서 깼다.이때 요시오 케이사이는 시중의 의사 5∼6명을 오게 하여 머리맡에 있게 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어떤 사람이 말하길 오늘 아침 일견 고개 밑에서 한 사람의 환자를 보았는데 곽란증이라고 생각했지만 오전에 죽었다고 했고 다른 사람은 홍복사(弘福寺) 앞에도 같은 증상의 환자가 있었다고 말했으며 또 다른 사람 역시 말하길, 분고(豊後) 마을에도 있었다고 했다.

이로부터 같은 병이 나날이 증가하여 3∼4일 후에는 나가사키 시내 가는 곳마다 이 병에 걸린 자가 있었고 결국은 장례를 준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다행히 가까운 시일 내에 다 나을 수 있었다. 이것이 최근 나가사키에서 콜레라가 유행한 첫 번째였다.  

사진기술 창시

  우리 나라에서 사진 기술의 시작은 내가 키요오에 있을 때 주선하여 성공시킨 것이므로, 의사(醫事)는 아니지만 생각나는 대로 써서 후일의 이야기꺼리로 하고 싶다.

내가 하루는 휴가를 얻어 Pompe 씨를 방문하였는데, 그는 집 뒤에서 열심히 사진기를 조작했다. 내가 오는 것을 기뻐하여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 기술이 아직은 능숙하지 않았는지 사진을 찍지 못했다. 다시 해도 성공하지 못했다.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거무스름한 사진 1장을 찍었다. 흡사 달빛에 비친 그림자가 벽에 보이는 것 같아서 이목구비를 하나도 구분할 수 없었다.

수일 후 오사카의 씨름단이 와서 씨름판이 열렸다. 나는 씨름을 좋아하였으므로 가서 보았다. 그 당시 씨름판을 마주보고 서쪽의 관람대에 사진 기계를 설치하고 이를 열심히 찍으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곳에 직접 가서 보니 당시의 사진기는 현재와 같이 속사법으로 되지 않아서 다소 시간이 걸렸고, 씨름 선수의 움직임으로 인해 그 영상을 찍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거리도 멀어서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 듯 했다. 그러나 수행 통역인 요코야마 마타노죠오(橫山又之丞)는 조금도 자신의 뜻을 더하지 않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는 등 매우 냉담했다.

내가 그 사진 찍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영국인이라고 했다. 이어서 충고하여 말하길, 당신은 지금 이곳에서 아무리 고심하더라도 헛수고만 할 뿐이다. 당신을 위해 조그마한 도움을 주어 편리한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오늘은 그만 두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날 밤 봉행소에 가서 오늘 본 바에 관해 말하고 편리한 방법을 제공할 수 있기를 부탁하니 봉행도 이것을 허락하고 나로 하여금 이를 처리하도록 하였고 동시에 혹 시정 사람들이 방해할 것을 우려하여 소리(小吏)로 하여금 이를 통제하도록 했다.

김강현 역 <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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