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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의학수업 시작…병원설립 태동 <5>
본격적인 의학수업 시작…병원설립 태동 <5>
  • 의사신문
  • 승인 2007.03.29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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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란교사인 Pompe 씨가 이를 듣고 매우 기뻐했다. 곧 날을 정해서 강좌를 열었는데 의학을 배우려는 자는 료오준 1명뿐이었다.어쩐지 매우 쓸쓸했다. 때문에 시중(市中)의 의사 두세 명을 배청(陪聽)시키려고 하였다. 당시 막부는 감찰로 하여금 전습의 학사(學事) 및 생도의 품행을 감독시켰다.

화란교사 Pompe의 강좌 시작

감찰이 말하기를, 자네는 막부의 명을 받드는 사람이지만, 시정의 의사에게 이것을 듣도록 하는 명이 없으므로 함부로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따라서 백방으로 변론한 끝에 나는 조수로서 배석(陪席)의 허가를 얻었다. 그렇지만 나와 함께 겨우 4∼5명 뿐이었다.

이후 나가사키에 머무는 제후의 가신(家臣)에게 설명하여 그 재국(在國) 에도시대 다이묘오나 그 家臣들이 영지에 있음을 의미) 의가의 자제를 부르려고 하였다. 우선 토오도오(藤堂)의 가신이 특히 친밀했으므로 편지로 주군에게 그 뜻을 전달했으며, 이어서 삿슈유(薩州), 히젠(肥前), 에치젠(越前), 죠슈(長州) 등의 모든 번(藩)을 유도해서 그 신하의 의사가 계속하여 모여들어 곧바로 30여 명에 달했다. 이것을 들은 작은 번의 의사들도 모두 몰려와 점점 많이 모이게 됐다.

강의는 매일 두 차례, 1회 각 1시간 30분씩이었다. 나는 처음에 키요오(崎陽)의 니시자카 호렌지 사(西坂本蓮 寺:나가사카에 있는 절)에 임시거처로 정하고 다음에 서역소(西役所:관청) 및 오오무라 마치(大村町)로 이사했으며, 나중에는 도오데라 코오후쿠지(唐寺興福 寺)로 옮겨가서 살았다. 숙(塾)에는 7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때부터 병원 설립의 희망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봉행(奉行: 행정 사무를 담당하는 무사의 우두머리)인 오카베 스루 수와 모의하였는데 많은 동의를 얻어 곧바로 에도에 의견을 말씀드렸다.이보다 앞서 내가 서역소에 있던 때에 원로(元老)인 이이 카니모리(井伊掃部 頭)가 어쩐 일인지 돌연 화란 교사의 초빙을 해지하고 유학생도는 남기지 말고 돌려보내라고 명령했다.

사람들은 뜻밖의 일에 놀랐으며 그렇게 명령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교사는 이의 없이 귀국 의 뜻을 승낙했다. 곧 봉행소에서 화란 국왕 부자 및 교사에게 극진한 선물을 보내며 부득이하게 중도해고 한다는 명령을 내렸으므로 그들로부터 별다른 항의를 받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때 나는 겨우 해부와 생리의 강의만을 들었기에 매우 아쉬웠다. 때문에 계속 키요오에 체재하면서 성공을 이루려고 하였고, 교사 Pompe 씨와 공사(公使) 등에게 의논하였다.

다행인지 의학 교관은 화란관(和蘭館)에 머물며 다른 거류민의 위생에 관한 일을 담당하도록 되었고 Pompe씨 한 사람만 나가사키에 머물게 되었다.

그 역시 내가 나가사키에 머무는 것을 바랬고 화란공사(和蘭公使)도 이것을 종용하여 의학 전과목을 졸업시키려고 봉행에게 건의하였더니 봉행도 이 취지에 찬성하여 다이로오(大老: 무가 정치에서 장군을 보좌하는 최고 직책)에 간청했다.

이때 다이로오의 말이 봉행으로부터의 청원도 있고 공사 및 교사의 호의에 대해서 침묵할 수도 없지만 일단 공명(公命)은 취소할 수 없기 때문에 청원은 허락하지 않고 신속히 귀부(歸府)하도록 하명한다.

이때 봉행이 다시 청원하면 그 청원서는 내가 광중(筐中)에 감춰두고 몇 년이 지나도 그 업을 이룰 때까지는 마치 잊어버린 것처럼 묻지 않을 것이다. 만일 업을 마치게 되면 다시 귀부를 명할 것이니, 안심하고 수업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이로오의 직(職)이 의생(醫生) 한 사람의 소치(所置)를 잊어버렸다 해도 법적으로 어떤 잘못이 있지는 않다. 유학비용 기타 일체를 여전히 종전과 같게 하겠다라고 했다.

아쉽게도 수이후젠(水府前) 츄우나곤(中納言: 태정관의 차관)과 협의하지 않아 명령을 어기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츄우나곤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돼 은혜와 원한이 한번에 가버려서 꿈같다. 오호라.

어느 날 봉행소 차관 나카모치 쿄오지로(永持享次郞: 나가이 겐바가 천거한 사람으로 대단히 재능 있는 사람이다)가 글로써 나에게 고하여 말하길 머지않아 목을 벨 죄인이 있는데 적(籍)이 없는 자여서 청원하면 해부를 허락할 수 있다고 했다.

곧 나카모치 쿄오지로를 방문하여 자세히 그것을 물어보니 죄인은 속리(俗吏)인 고지마 키사에몬(小島喜左衛門)의 종복으로 고지마 키사에몬이 관에 맡겼던 재물을 많이 도둑질한 자였다.

분명히 에도에서도 많은 죄를 저질렀던 사람일 것이다. 따라서 참형에 처한 후 해부되어도 별다른 지장은 없었다. 봉행도 그것을 허락하였기 때문에 청원할 수 있었다.

나는 기쁨에 겨워 곧바로 원서를 봉행에게 올렸다. 그러나 다음날 고지마 키사에몬이 글로 써서 말하기를 `그 죄인은 다른 사고가 있으므로 해부를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나는 글을 읽자마자 봉행소에 달려가 면회를 부탁했다.

해부학 실습

나가모치 쿄오지로(永持享次郞)가 `무슨 일인가 우선 나에게 이야기하도록 하라'고 해서 곧 고지마 키사에몬의 글을 보여드리니, 웃으며 말하길 `무슨 사고가 있구나 고지마 키사에몬은 말할 것도 없이 소인배이니 그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네가 만일 강하게 문제를 제기한다면 오히려 다소간의 지장을 일으킬 지도 모른다'고 했다. 요컨대 봉행이 허가하였기에 지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뜻에 따라 해부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참형되는 날 시체를 얻어 해부를 시행하기로 결정하여 요시오 케이사이(吉雄圭齋: 나가사키의 의사)가 기타 아무개와 이야기하여 장소를 설치하고, 지붕을 덮어 사방 4칸의 해부실을 가설했으며 인부를 고용하여 물과 땔감을 주선하는 등 2∼3일 내에 준비를 완료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갑자기 또 하나의 방해가 발생했는데 다름이 아니라 당시 양이론(攘夷論)이 성할 때여서 죄인이라도 내국인의 시체를 외국인에게 맡겨 내장을 해부하고 그 눈을 절개하는 것은 국가의 체면과 관계되는 일이라 설사 교관이라 하더라도 외국인의 손을 사용하는 것은 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우리나라 사람이 해부를 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했다. 소리(小吏)의 무리들이 이 같은 어리석은 주장하니 봉행도 그것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다.

김강현 역<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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