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17:41 (토)
종두의를 양성하라 <25>
종두의를 양성하라 <25>
  • 의사신문
  • 승인 2007.03.19 14: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성을 늘리는 종두

조선정부의 `종두'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종두는 유아사망율을 낮추어 백성을 늘릴 수 있는 유력한 방도였다. 정부 차원의 우두사업은 1882∼1883년 지방에 파견된 몇몇 암행어사들이 우두국(牛痘局) 설치를 추진한 데서 비롯되었다. 전라어사 박영교와 충청어사 이용호가 각각 전주와 공주에 우두국을 설치, 종두 기술을 가르치게 했다.

알렌이 제중원에서 한창 진료하기 시작하던 1885∼1886년 지석영은 본격적으로 정부 관리로서 우두법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충청도 우두교수관(牛痘敎授官) 자격으로 그 지역의 우두접종을 담당할 우두의(牛痘醫)를 길러낸 것이다. 틈틈이 자신이 배운 우두법을 정리해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정부는 1885∼1890년간 전국 각지에 우두국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1890년 돌연 우두국은 모두 폐지되고 우두사업은 주춤하고 만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진퇴양난에 빠진 우두사업

정부의 우두사업 지침서라 할 수 있는 `우두절목'(牛痘節目)에 따르면, 당시 우두 접종은 생후 1년 미만의 아이들은 모두 접종을 받아야 했다. 우두 접종은 서양의료 시술을 국가적으로 의무화한 첫 번째 사례였다. 정부로서는 백성의 생명을 살리는 뜻깊은 일이었지만, 그만큼 심한 반발도 예상되는 사업이었다.

민간에서는 서양에 대한 적대감과 의구심이 강했기에 종두의사가 어린아이를 잡아먹는다거나 죽인다는 유언비어가 많이 떠돌았다. 두창에 걸릴 때마다 굿으로 먹고 살던 무당들의 비난도 한 몫 했다. 민간에서 인두법(人痘法)으로 종두를 해온 이들의 반발도 있었다. 정부에서는 우두 접종만을 인정하여 인두 접종시 벌금을 내게 했으니 전국의 인두 시술자들은 졸지에 수입원이 막히게 된 셈이었다.

정부 정책과 우두의사의 문제도 컸다. 당시 재정난을 겪던 국가는 별도의 우두재정을 마련하지 않고 우두의사로 하여금 5냥씩을 거두어 그 안에서 시술에 필요한 의료비용과 급료를 해결하도록 했다. 그래서 백성을 윽박지르고 토색질하는 우두의사들에 대한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종두사업을 일선에서 이끌던 지석영이 1887년 유배된 것도 이러한 정세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종두 규칙의 반포와 양성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895년 `종두규칙'과 `종두의양성규칙'이 반포되었다. 이에 따라 설치될 종두의양성소는 내부 위생국 관할 기관이었으나 당시 한성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던 후루시로 바이케이(古城梅溪)의 사설 양성소 졸업자들에게 종두의사 인허장을 내주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정부는 제1·2기 졸업생 28명을 한성 내 5곳에 설치한 종두소(種痘所)에 배속시켰고, 그 중 10명을 1899년에 설립된 `병원'(광제원)에 고용했다. 제3기 졸업생 53명은 1899년 7월부터 전국 각지에 종두사무위원으로 파견되어 종계소(種繼所)를 설치하고 두묘(痘苗)를 만들고 접종하는 일을 맡았다. 종두법이 1899년에 설립된 의학교의 한 과목으로 포함되면서 종두의양성소는 단명하게 되었다. 나아가 종두 시술은 의학교가 배출할 의사 업무의 하나가 된 것이다.

 

이흥기 <서울대병원 병원사연구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