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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모토의 양자로···난학에 대한 열망 <3>
마츠모토의 양자로···난학에 대한 열망 <3>
  • 의사신문
  • 승인 2007.03.08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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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토오 타이젠(佐藤泰然)의 차남으로 성장하여 마츠모토(松本) 집안의 양자가 된 사람이다. 지금 그 마츠모토 가의 양자가 되었던 일과 곤란했던 한 때의 일을 쓰고자 한다.

옛날 막부정권 시절 일본 의사의 전권은 막부의 짓시이(執匙醫: 높은 관직을 가진 의사의 계급)에게 달려 있었는데 내가 17세 되던 무렵 당시의 짓시이 호오인(法印: 에도시대 의사이름에 붙이던 칭호) 타키 라쿠신인(多紀樂眞院)의 보고로 막의(幕醫)는 서양의(蘭方)를 금지하는 령을 내렸고 보대(譜代: 대대로 섬겨온 신하)의 제후 또한 이를 따르는 자가 과반수에 이르렀다.

그런데 나의 생부는 서양의(蘭方醫)로 이름이 나있었다. 료오고쿠(兩國)에 살았고 호오인 타키 라쿠신인이 있는 곳과 겨우 몇 정(町:1정은 109m)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평소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마츠모토 집안에서 나를 양자로 삼는 것이 매우 어려웠는데 다행히 당시의 감찰(監察: 당시의 老中으로 에도막부에서 쇼군에 직속되어 정무를 총괄하고 감독하던 직책)이 양자에 관한 법은 우선 국가에 쓰임이 될만한 인물을 얻는데 있고, 게다가 료우준(良順)은 나이 17세로 일단 한방의학도 배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 미숙한 점은 마츠모토 집안을 계승한 후에 배워도 된다. 어찌 서양의 집안 출신이라고 해서 버릴 수가 있겠는가 라고 했다.

한의학관 시험

그런데 한의사는 오히려 방해할 욕심에 의학관(醫學館)에서 학업시험을 본 후에 양자 삼는 일을 결정해야 한다고 정했다. 따라서 나는 급히 한의서를 보게 되었는데 수개월의 학습으로 그 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기에 양부는 마음에 각오를 하고 감찰과 상의하여 만일 낙제하면 양자로서 하타모토(旗本: 에도 시대 장군가에 직속된 무사로 직접 장군을 만날 자격이 있는 봉록이 만석 미만 오백석 이상인 자) 이원(吏員)이 되어도 괜찮다. 반드시 가업의 세습을 원하지는 않는다고 말은 했지만 나에게는 가급적 힘껏 한방의학책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때 나는 주야로 공부하여 그 학문에 힘썼다. 이때 의학관원과 감찰은 그 시험일을 서로 상의하여 1∼2개월을 연기하였고, 이후 나는 소환을 받았다. 쥰이 18세 때의 일이었다.

의학관에는 당시 짓시이였던 타키 라쿠신인 호오인, 노마쥬쇼오인(野間壽昌院) 호오인, 기카무라 안쇼오(北村安昌) 호오겐(法眼: 호오인 아래의 계급), 타키아라(多紀安良) 호오겐 등이 차례로 앉아있었고, 감찰 및 차관 두 사람이 그 좌측에 앉아 있었으며 필기자 5명이 그 우측에 있었다. 각자가 정복을 입고 있었다.
시업과 8조 필기 2조(試業科 八條 筆記 二條) 독본 문답이 있었다. 라쿠신인 호오인부터 시작하여 5명 모두 어려운 문제를 질문하였기에 수개월 동안 공부를 하긴 했으나 답변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맥론(脈論)에 이르러서는 한방 해부를 잘 몰랐으므로 만일 일이 잘못된다면 해부를 논하는 서양의학으로 이것을 헤쳐가려고 각오했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운 생각없이 8개조(八個條)를 모두 대답했다. 모두 어려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까다로운 문제는 비교적 범위가 넓지 않았고 수험공부를 신중하고 면밀하게 하여서 의외의 성공을 거두었다.

만일 이와 반대로 쉬운 질문을 받았더라면 어쩌면 대답하는데 곤란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쥰은 그 때문에 어지러워서 일을 끝내고 나가면서 많은 코피를 흘렸다. 시업(試業)은 감찰이 감독하는 것으로 한의사들이 왜곡되게 나쁜 평가를 할 수 없었다. 가업도 발군의 실력으로 섬기겠다는 명분을 가지고 오래 전부터 쇼군에게 알려 양자에 관한 허가를 신속히 받았기에 한의(漢醫)에게 모욕 받지도 않았고 當路(책임있는 지위의 사람)의 유지(有志)로부터도 크게 칭찬을 받았다. 이것이 나중에 금령(禁令)을 깨고 나가사키로 유학을 명받는 계기가 되었다.

타키 라쿠신인의 형(호는 게이산(桂山)은 톈메이(天明: 1781∼1788) 때에 짓시 호오인으로 야마모토 기타야마(山本北山)의 문하가 되었다. 그는 당시 시타야 미쿠라 바시(下谷美倉橋) 길모퉁이에 살았고 그 집에 의학관을 창립한 사람으로 성품이 담백하고 늘 요오다 남포(太田南畝) 등과 제하며 널리 한서를 읽고 능히 의서에 통달하였다. 또한 그의 저서 ‘내과찬요(內科撰要)’에서 후세에 서양의학이 시행될 것을 예언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우타가와 신사이(宇田川榛齋)가 ‘내과찬요’를 서술하자 서언을 만들어 직접 쓰기도 했는데, 라쿠신인은 그 형과 달리 서양의학을 싫어하며 오히려 名家(서양의)를 모욕하였으니 그의 도량과 재간을 비웃을 만 하다.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지 않는 무리들은 아름답기가 어렵다. 하물며 세상의 대세에 어두워 여론을 막으려고 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흐르는 물을 막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어찌 훈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서양의학의 금지

이후 서양 의학의 금지는 더욱더 엄하여져서 그것을 배울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나는 난서(蘭書)를 읽는 법을 후카가와 후유키 마치(深川 冬木町: 도요쿄의 지명)에 사는 츠보이신도오(坪井信道) 선생께 배웠다. 그곳은 내가 사는 이마리 마치(居麴町)와 2리(1리는 3.9km) 정도 떨어져 있어 매일 새벽 별을 바라보며 가서 오전 10시에 집으로 돌아왔고, 그 이후에 마츠모토(松本) 댁에서 조약(調藥)을 맡아서 오후에는 대진(代診)을 하는 등 사방으로 분주하였다. 점등(点燈) 후에는 모든 일을 전폐하고 오로지 난서를 읽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서적이 적었고 사전은 겨우 ‘역건(譯鍵)’이라고 불리는 것에 의지할 뿐이었다. 후에 막부는 ‘번서조서(蕃書調所)’를 설치하여 양서(洋書)를 배워야 한다는 포달(布達)을 내렸다. 따라서 크게 힘을 얻었지만 의사(醫事)는 번역서 이외에는 탐구할 만한 것이 없었다. 원서 중 해독이 어려운 곳이 있으면, 타케우치 겐도오(竹內玄同) 선생이 인근에 있어서 틈을 얻어 그 알지 못하는 점을 질문하곤 했지만, 내가 해독하지 못하는 것은 선생도 또한 알지 못했다. 당시의 諸大家 아닌 인기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자무식이었지만 다만 하야시 도오카이(林洞海: 친자인 켄카이는 육군군의총감임) 선생은 진실로 나를 가르쳐서 많은 유익을 주었다. 그렇지만 신발을 신은 채로 발을 긁는 느낌이 있었다. 따라서 서양인에게 직접 배우고 싶었지만 국가의 법이 있어서 범할 수가 없었다. 환식(歡息)만이 있을 뿐이었다.

김강현 역<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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