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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모토 쥰과 일본 근대의학의 태동 <2>
마츠모토 쥰과 일본 근대의학의 태동 <2>
  • 의사신문
  • 승인 2007.03.08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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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모토 집안과 난학의 만남

마츠모토 쥰이 태어날 무렵 타이젠(泰然)은 타나베쇼우에몬(田邊庄右衛門)이라고 불리는 하타모토(旗本: 관직명) 이나사에몬(伊奈左衛門)을 섬겼으나 텐보 원년부터 아다치쵸오(足立長雋)의 난학쥬쿠(蘭學塾)에 다녔다. 그보다 앞서 나중에 마츠모토 쥰의 양부가 된 관의(官醫)인 마츠모토 료오스케(松本良甫)와 알게 되었고 그의 권유로 난학(蘭學)을 배우기 시작한 듯하다.

마츠모토(松本) 집안은 1692년 구과(口科:당시 치과의 표현)로서 막부의 의관으로 등용되었다. 이후로 대대로 막부를 섬겨오다가 1777년에 사정이 있어서 면직되었다가 후대에 의관으로 복직된 가문이었다. 따라서 의관으로서 신분이 낮아 난학을 가지고 입신출세를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 보람이 있어서 1864년에는 오쿠이시(奧醫師: 쇼군과 그의 부인들을 위한 의사)가 되었다.

타이젠은 아다치쵸오(足立長雋)의 쥬쿠(塾)교수 직위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무렵 에도에 있던 다카노쵸오에이(高野長英)에게 가르침을 구했으나 실망하여서 나가사키(長崎) 유학을 결심하였다. 1834년에는 이나(伊奈) 집안의 일을 그만두고 이름을 타나베쇼우에몬에서 와다타이젠(和田泰然)으로 고쳤다. 와다(和田)는 모계의 성으로 부계의 성은 사이토(佐藤)이다. 1843년에 에도를 떠나 사쿠라(佐倉)에 이주했을 때 와다에서 사이토로 개명하였다. 타나베는 타이젠의 부친 사이토가 들어갔던 양갓집의 성이다.

나가사키에는 아다치쵸오의 동문이었던 하야시 도오카이(林洞海)가 동행하였다. 이곳에서 스에츠구 다이세키(末次大石) 등에게 난학을 배웠고 1838년에 에도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는 도오카이(洞海) 외에 미야케 곤사이(三宅艮齋), 하나오카 난요오(岡南洋), 시마타 겐레이(島田玄禮) 등이 동행하였다.

에도에 도착하여 야겐보리(藥硏堀)에서 와다쥬쿠(和田塾=蘭方塾)를 열었는데 이것을 하야시 도오카이(林洞海), 미야케 곤사이(三宅艮齋)가 도와주었다. 1843년에 타이젠은 와다쥬쿠를 하야시 도오카이(林洞海)에게 맡기고 사쿠라(佐倉)로 이주하여 그곳에 쥰텐도(順天堂)를 열었다. 쥰텐도는 오사카의 오가타 코오안(緖方洪庵)의 테키쥬쿠(適塾)와 나란히 막부 말기의 난방쥬쿠(蘭方塾)로 이름을 떨쳤다.

타이젠은 친자식을 전부 양자로 내보내고 문제(門弟) 중에서 가장 우수한 야마구치 카이(山口舜海)를 양자로 맞이하여 쥰텐도를 잇게 하였다. 도오카이는 메이지때 사토오 타카나카(佐藤尙中)라고 개명하였고, 대학동교(大學東校: 동경의 의학교)의 대학 대박사로서 근대의학교육의 기초를 쌓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료오쥰이 나가사키 재학중에 타카나카이도 나가사키에 갔었고 Pompe를 사사(師事)하였는데 Pompe는 타카나카의 실력을 높게 평가하였다.

서양의학의 전도사 Pompe

일본의 근대의학교육은 1857년에 일본에 온 Johannes Lydius Cathrinus Pompe van Meedervoort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물론 Siebolt로 대표되는 그때까지 일본에 온 난방의(蘭館醫)에 의해 일본인은 의학을 배우고 있었지만 그것은 단편적인 지식을 얻는 것이었고 계통이 잡힌 의학교육을 행한 것은 Pompe가 최초였다.

Pompe는 1829년 남부 네덜란드의 후란도루 지방의 부릿게 마을(현재는 벨기에 영토)에서 태어났다. 1849년 육군 군의학교를 졸업하고 3등 군의로서 해병대에 소속되어 네덜란드 식민지인 동인도에 파견되었다가 1885년에 귀국한 뒤 1년 간 공부를 하고 군의 승격 시험에 합격하여 2등 군의가 되었다. 마침 이때 해군 전습(傳習: 기술이나 지식 따위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워 익힘)을 위한 2차 일본 파견 대원 모집이 있었다. 이미 2차 파견대 대장으로 정해진 캇텐디게의 지명으로 Pompe는 군의로서 이 파견대에 참가하게 되었다. 일본측은 해군뿐만 아니라 의학 전습도 담당할 것을 의뢰했다. Pompe는 기꺼이 그것을 승낙하고 일본으로 향했다.

Pompe는 1857년 9월 21일에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이로부터 약 6주 후에 전습이 시작되었는데 의학 전습도 나가사키 부교오쇼(奉行所)의 니시야쿠쇼(西役所)에서 시작되었다. 이 전습에 앞서 Pompe와 마츠모토 료오쥰이 만났다.

일본 최초의 근대 병원 설립

Pompe는 첫 대면에서 료오쥰이 지도력이 있고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간파하였다. 료오쥰은 학생 대표로서 또 부교오쇼에 있어서는 의학교 측의 대표로서 모든 일의 교섭을 담당했다. Pompe는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의학은 일반교육, 기초의학, 임상의학 등의 순서를 따라서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료오쥰은 이를 잘 이해하였고 5년 과정으로 시작할 것을 결정하였다. 또 Pompe는 료오쥰에게 임상의학교육에는 부속병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하였고, 그 후 료오쥰이 이 문제를 나가사키 부교오쇼와 교섭, Pompe가 일본에 온 지 4년 째 되던 해인 1861년 드디어 병원이 완성되었다. 그것이 바로 나가사키 양생소(養生所)이다. 이것은 일본 최초로 근대의학에 의거하여 세워진 병원이었으며 료오쥰은 이 때 병설된 의학소(醫學所)의 소장(所長)이 되었다.

Pompe는 그 다음해인 1862년 11월 1일 예정되어 있던 5년의 체재를 끝내고 귀국하였다. 이 5년간의 생활 및 당시의 일본과 네덜란드 관계 다른 외국과의 관계를 기술한 보고서가 `Pompe 일본 체재 견문기-일본에 있던 5년'으로 남아있다.

마츠모토 료오준은 Pompe가 일본을 떠난 직후 에도로 돌아가 막부의 서양 의학소 부소장(副所長)이 되었다. 소장은 오가타 코오안(緖方洪庵)이었다. 다음 해인 1863년 洪庵의 급사로 료오쥰은 소장이 되었고 이곳을 Pompe에게 배운 의학교육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 후 곧바로 막부 말기의 동란기에 들어가 의학소도 같이 휘말리게 되었고 료오쥰의 교육 개혁은 그 효과를 충분히 나타내기도 전에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맞이하게 되었다.

메이지 신정부는 다른 모든 문제와 같이 의학도 서양을 모범으로 하여 개혁하려는 방침을 내세웠다. 료오쥰이 소장으로 있던 막부의 의학소는 무진년 전쟁 중에 육군병원으로 태어난 대병원과 합병하여 의학교 겸 병원이 되었다. 그 후 다시 수많은 변천을 겪어 1867년에는 동경대학 의학부로 자리잡게 되었다.

김강현 역<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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