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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츄'로 살펴보는 일본 근대의학사 <1>
'란츄'로 살펴보는 일본 근대의학사 <1>
  • 의사신문
  • 승인 2007.03.08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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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부터 명치유신 후 일본의 육군 군의총감으로 재직하면서 일본 군의제도를 확립하는데 큰 공헌을 했던 마츠모토 쥰(松本順)의 회고록을 번역 게재한다. `해설'에도 나오듯이 그는 자신의 고희 축하연에 참석한 축하객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란츄(蘭疇)'라는 이름의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그는 이 자서전에서 일본이 서양의학을 도입하는 과정에서부터 일본의 의료제도가 정착되어가는 메이지시대까지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기술하고 있다. 한국이 서양의학을 도입했던 주요 국가 중 하나가 일본이었다는 점에서 이 회고록은 한국 근대의학사를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번역본은 일본 헤이봉샤(平凡社)에서 1980년 386번째 토요분코(東洋文庫)로 간행한 `송본순자전-장여전재자전(松本順自傳_長與專齋自傳)'을 이용하였다.

이번 연재에 부득이 한자가 많이 다뤄진 데 대해 독자들의 해량을 바란다. 필자주

마츠모토 쥰은?

1832년 7월 13일∼1907년 3월 12일. 에도시대 후기의 막부 바쿠후 신하이며, 메이지 후에는 초대 육군군의총감과 귀족원의 칙선의원등을 지냈다. 부친은 사쿠라번 번의사로서 쥰텐토(현재의 순천당의대 전신)을 경영하던 사토타이젠이다. 외무대신이던 하야시타다스가 친동생이다. 후에 카에이3년에 바쿠후인 마츠모토료오호의 양자가 되었다. 아명은 사토오쥰노스케이었다. 메이지4년에 종5위에 오른 뒤에 마츠모토 쥰이라고 개명하였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필요에 따라서 자식들을 서로 양자로 주고 받기도 하여 수시로 성을 바꾸거나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 아호는 란츄이거나 라쿠치라고도 불리운다. 또한 콘도이사미와 신센구미의 공양탑을 세웠다는 설도 있다.

생 애

덴포(天保)3년 6월 16일에 에도 아자부(지금의 토쿄 미나토구)의 사토타이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857년에 막부의 명을 받아서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 군의인 Pompe에게 조수로서 네덜란드 의학을 배우며 근대의학교육에 종사하였다. 즉, 일본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나가사키 양생소를 개설 하는데 노력하였다. 또 의학 발전을 위해 해부의 절실함을 깨닫고 사형수를 대상으로 해부를 하기도 하였다. 초기의 시체해부에 대한 거부감을 불경의 경전 설법과 유럽의 실태를 설명하고 오히려 속죄하는 일로 감동케 한 적도 있었다.

쇼오군 시의를 지내던 중 토쿠가와이에모치(제14대)등의 치료를 담당하였다. 그의 호방한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제15대 장군인 토쿠가와 요시노부가 몹시 피곤함을 호소하였다. 그는 즉각 극도로 업무에 시달려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심신에 병이 생겼다고 판단했다. 곧 당시 제한되던 마약인 아편을 투여하여 하루밤낮을 푹 자게 하여 병을 낫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이즈번의 부하로 쿄토의 치안유지를 위해 활동하던 신센구미의 국장인 콘도오이사미와도 친분이 있어 단원들의 진료를 담당하였다. 보신전쟁에서는 오오우 에츠렛번 동맹군의 군의가 되기도 하였다. 메이지 천황즉위후(즉 바쿠후 몰락으로 토쿠가와 쇼오군시대는 끝남)에는 일시 투옥되었지만 사면되었다. 이후 동경에 가서 와세다에 일본 최초의 사립 병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던 중 육군 다이스케 야마가타아리토모등의 추천으로 군의두가 되어 육군 군의부를 편제하였다. 이어 메이지6년에 초대 군의총감이 되어 일본 육군군의제도를 확립하였다. 귀족원 의원에 선출되어 나중에 남작의 지위에 올랐으며 1907년에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군의학의 전문가 답게 공중위생학에도 뜻을 펼쳐 우유의 섭취나 해수욕 장려등의 보급에도 관여하였다. 그가 세운 일본 최초의 해수욕장인 오오이소에 기념비가 있다

묘소는 가나가와 현 오오이소 마치의 묘오다이지에 있다.

`란츄(蘭疇)'는 메이지 35년(1902) 마츠모토 쥰이 71세 당시 대판에서 열린 고희 축하연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자 썼던 자서전이다. 이 무렵 마츠모토 쥰은 안질환으로 시력이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6월 17일에 구술을 시작하여 같은 달 25일에 미완성인 채로 탈고했다(후년에 `명치문화전집(明治文化全集)'에 수록되었음). 이것에 다소 가필을 하여 메이지 39년(1906)부터 다음 해에 걸쳐서 `동경의사신지(東京醫事新誌)'에 `란츄 지덴(蘭疇自傳)'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요오의 란츄(崎陽의 蘭疇)'와 `에도의 란츄(江戶의 蘭疇)'까지로서 `메이지의 란츄(明治의 蘭疇)'는 실리지 않았다. 이는 마츠모토 쥰이 메이지 40년(1907) 3월 12일에 사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동경의사신지' 연재에 근거했고 `메이지의 란츄'는 교회·축하연에서 나눠 준 `란츄'를 이용했다.

`란츄'에는 마츠모토 쥰의 호방한 성격이 잘 반영되어 있다. 또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에 걸친 의학의 근대화뿐만 아니라 사회의 동정을 파악하는데 재미있는 읽을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Pompe(네델란드 해군 군의관)가 막부 말기의 에도 나가사키에 왔을 무렵의 명치유신의 동란 당시 육군 군의제도의 확립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미 만년이었고 게다가 단기간에 쓰여져 사실상의 잘못이 군데군데 발견되는데, 이에는 따로 두주(頭註)를 붙여 두었다. 마츠모토 쥰은 덴포 3년(1832) 에도 막부의 아자부사이켄에 살던 사토오타이젠(1804∼1872)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쥰노스케(順之助)이었고 나중에 료오준(良順)으로 또 메이지 6년(1873)부터는 쥰(順)으로 고쳤다 호는 란츄(蘭疇)와 가쿠티(樂知)가 있다.

역자소개
번역자인 김강현 선생은 1984년 연세의대를 졸업하고 현재 국립의료원 신경외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역자는 진료로 바쁜 일과에도 불구하고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의학사를 공부, 동서양을 넘나드는 해박한 역사관과 지식을 갖추고 있다. 중국어 및 일본어등 동양권 언어와 문화에도 탁월한 실력을 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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