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0:06 (금)
한성병원 <22>
한성병원 <22>
  • 의사신문
  • 승인 2007.02.27 14: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인의 마음을 사라

알렌이 조선정부의 호의를 얻어 중앙 의료기관인 제중원 의사로 근무하게 된 1885년, 서울의 일본공사관에서는 “이번의 변동에 의해 모든 일이 화병(畵餠)이 되어버렸다”고 자국 외무성에 보고했다. 대체 무엇이 `그림의 떡'이 되었다는 것일까?

당시 일본은 카이로세(海瀨敏行)라는 군의를 공사관 부속 의관으로 두고 조선인들에 대한 `시료(施療)' 활동을 해오고 있었다. 조선정부와 조선인들의 마음을 사두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으로 당시 조선 정계의 최고 실력자 민영익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을 때, 가까이에 카이로세가 있었지만 묄렌도르프도 갑신정변의 배후에 일본이 있음을 짐작한 듯 알렌에게 민영익을 데려갔다. 결국 조선정부는 일본인이 아닌 미국인을 정부의료기관의 파트너로 선택했다. 1876년 개항 뒤 각 개항장 영사관과 서울의 공사관에 부속 의원을 두고 시료활동을 하며 쌓아온 노력의 결과가 일순 무너지는 시점이었다.

겉은 민간병원, 속은 정부병원

십년 전 미국인 선교의사에게 선수를 빼앗겼던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으면서 재차 기회를 노렸다. 전쟁 중에 시작된 갑오개혁으로 세와키(瀨脇壽雄)가 위생 및 의학 관련 고문으로 임용되었는데, 그가 1895년에 설립한 것이 한성병원이다. 그러나 1896년 2월 고종이 일본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고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쳐를 옮긴 뒤(`아관파천') 세와키가 해고되자, 일본정부는 이 병원을 사들였다.

한성병원은 “의약(醫藥)으로 한국인을 회유개도(懷柔開導)”하기 위해 일본 외무성 및 해군성의 보조금으로 매수된 것이었지만 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독력(獨力)'으로 유지하는 것처럼 가장했다. 조선 거주 일본인들에게 상당한 기부금을 모은 것도 그 이유였다. 한성병원은 기대 이상으로 성공을 거두어 많은 조선인 환자를 무료로 시술하면서도 원만한 경영을 할 수 있었다. 주한일본공사는 서울에 하나의 의학교와 지방에 3개의 지원(支院)을 세우는 확장안까지 추진했다. 1899년 주한일본공사의 보고서에는 한성병원은 서울의 많은 병원 중 여러 면에서 `당당히 1위'라며 일본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보조하여 당국(當國-조선)에서 일본인이 경영한 회유책 중 그 성공 효과가 가장 현저한 것”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공립병원으로의 전환

일본 해군 측에서는 군의 파견을 부담스러워했지만 일본공사관 측은 조선인들로부터 불신을 살 것을 우려하여 지속적인 파견을 요청했다. 이후 러일전쟁 초기 한국 황실이 `동양평화를 보호하기 위해' 병사를 파견한 것에 대해 `돈목(敦睦)'의 표시로 내탕금 18만원을 하사하자 일본공사는 이 돈으로 병원처럼 영원히 기념될 만한 것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일본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기존 한성병원을 신설 병원에 넘겨주기로 해서 한성병원은 경성 일본 거류민단 경영의 공립병원(公立病院)으로 다시 탄생했다. 병원 경영이 식민화의 저의를 감추려는 정치적 위장술로 이용된 역사, 서글프지만 직시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흥기 <서울대병원 병원사연구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